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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샤를마뉴의 왕관’ 탐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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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호 25면

샤를마뉴를 표현한 프랑스 물랭에 있는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영국에서 발행되는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는 ‘샬러메인(Charlemagne)’이라는 고정란이 있다. 유럽연합에 대한 분석이 실리는 이 난에 샬러메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초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샤를마뉴(742~814) 대제에 대한 오마주다. 샤를마뉴는 ‘유럽의 아버지’다. 역사가·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도 그를 그렇게 칭했다. 유럽연합의 탄생 이후 샤를마뉴는 ‘유럽연합의 아버지’가 됐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1> 샤를마뉴 대제

유럽, 유럽연합의 아버지
샤를마뉴의 프랑크 제국은 오늘날의 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스페인 등지에 걸쳐 있었다. 샤를마뉴는 476년 사라진 서로마제국을 복원했다. 그의 제국은 1957년 로마조약으로 유럽경제공동체(ECC·유럽연합의 전신)를 결성한 국가들의 영역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샤를마뉴는 ‘유럽연합의 아버지들’에게 영감을 줬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위원회 건물의 이름도 ‘샤를마뉴’다. 이처럼 역사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질기다. 16세기 종교개혁의 결과를 봐도 그렇다. 로마제국의 울타리 안은 대체적으로 가톨릭으로 남았다. 울타리 밖은 개신교가 자리 잡았다.

샤를마뉴는 라틴어(Carolus Magnus)·영어(Charles the Great, Charlemagne)·프랑스어(Charlemagne)·독일어(Karl der Grosse) 등 언어에 따라 다양하게 불린다. 언어를 초월해 그는 대제다. 유럽 역사에서 대왕·대제로 불린 군주는 손꼽을 정도다. 역사는 샤를마뉴 외에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기원전 356~323) 대왕, 잉글랜드 웨섹스의 앨프리드(849~899) 대왕,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1712~86) 대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1729~1796) 대제 정도에게만 대왕·대제 타이틀을 허락했다.

나폴레옹, 히틀러, 샤를 드골과 같은 인물들에게 샤를마뉴는 시대를 뛰어넘어 극복해야 할 역사의 라이벌이자 멘토였다. 역대 프랑스 왕들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은 물론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사용된 왕관은 ‘샤를마뉴의 왕관’이라 불렸다.

샤를마뉴는 정복자였다. 소년 시절부터 샤를마뉴는 키가 작아 ‘단신왕’ 피핀(페팽·714~768)이라 불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전쟁을 배웠다. 샤를마뉴는 54차례 출정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를 연 아버지가 물려준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54차례 출정 중 절반은 샤를마뉴가 직접 나섰다.

샤를마뉴의 친필 사인.

정복사업 성공의 비결은 새로운 무기가 아니라 조직과 준비에 있었다. 군사행동에 앞서 샤를마뉴는 귀족과 주교들에게 인력·무기·식량 내역을 구체적으로 알려 징발했다. 적들에 비해 병참술이 뛰어났다. 샤를마뉴 군대의 출정인원은 8000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진군했다. 포위공격전술(siege tactics)도 뛰어났다. 나폴레옹도 샤를마뉴의 전술에 대해 연구했다.

공부하기 좋아한 정복자
샤를마뉴는 기골이 장대했다. 그의 관은 어려 차례 개봉됐는데 키를 재 보니 1m84~90㎝에 달했다. 당시 성인 남성 평균 키는 1m69㎝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사냥·수영을 즐겼으며 쉬지 않고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점검했다. 또한 그는 학문을 숭상했다. 샤를마뉴는 영국·이탈리아 등지로부터 학자들을 수입했다. 초빙한 학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앨퀸(732년께~804)이 782년 샤를마뉴 곁에 와서 설립한 궁정학교는 요즘으로 치면 싱크탱크(think tank) 구실도 했다.

샤를마뉴의 시대는 상당수 성직자도 라틴어 불가타성경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의 시대’였다. 샤를마뉴는 식사 중에도 수준 높은 담론을 즐겼다. 문법과 산수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읽을 수는 있었으나 쓰지는 못했다. 읽는 것도 신통치 못했다는 설도 있다. 샤를마뉴는 베개 밑에 책을 깔고 잤다. 자는 동안에 문자를 해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신적 사고 때문이었다. 그만큼 지식 욕구가 컸다. 그는 라틴어·그리스어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를 ‘우상화’하는 과정에서 그가 아랍어도 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샤를마뉴 시대까지 살아남은 로마시대 문헌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약 8000개의 사본이다. 샤를마뉴의 공이 크다. 그는 문헌 수집광이었으며 대성당·수도원에 학교를 설립했다. 샤를마뉴가 후원한 학교들이 유럽 대학 교육의 기원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마제국을 뚫고 들어온 다른 게르만 부족들은 다신교나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다. 지도층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평민은 가톨릭을 믿는 부족들도 많았다. 4세기 초반 중부 유럽으로부터 이주해 지금의 프랑스 지역 일대에 정착한 프랑크족은 예외였다.

메로빙거 왕조 클로비스(481년께~511) 왕의 개종 이래 가톨릭을 믿게 된 프랑크족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샤를마뉴는 가톨릭교회의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에게 적대적인 로마의 귀족세력으로부터 그를 보호했다. 레오 3세는 800년 성베드로성당의 성탄절 미사에 참석하러 온 샤를마뉴를 ‘로마인의 황제’으로 선포했다. 이때 탄생한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감투는 나폴레옹이 1806년 폐기할 때까지 유지됐다.

교회와 샤를마뉴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였다. 샤를마뉴는 교회의 영적인 권위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샤를마뉴는 유럽의 종교적 미래를 결정했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았다. 별명이 ‘마르텔(Martel), 즉 ‘망치’였던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어 간 것이다. 마르텔은 서부 유럽으로 진공하는 무슬림 군대를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저지했다. 샤를마뉴의 54회 군사행동 중에서 12~14회 정도만 순수 군사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교황을 보호하거나 피정복 지역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것 등 종교적인 이유도 섞여 있었다. 개종시킨 다음에도 새로운 신민(臣民)들의 가톨릭화는 계속됐다. 샤를마뉴는 새로운 교구를 창설했으며 당시 세간에 광범위하게 퍼진 관습이었던 근친상간을 금지했다. 성직자들에게는 순결을 요구했다.

샤를마뉴는 세속과 교회가 밀착된 체제를 만들었다. 매년 봄 귀족들과 교회 고위 성직자들과 회의를 개최해 새로운 법령을 공표하고 정복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교회의 교리 문제에 대해서도 큰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샤를마뉴는 미시도미니치(missi dominci·군주의 심부름꾼들)라 불리는 지방행정 감독관들을 파견했다. 감시 대상에는 영주들뿐만 아니라 성직자들도 포함됐다.

사망 후 한 세대도 안 지나 제국 사라져
당시 패전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샤를마뉴는 종종 자비를 베풀었다. 예외가 있었다. 개종을 거부하는 경우였다. 샤를마뉴는 가톨릭 세례와 처형,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외가 인정됐다. 그는 유대인들의 고리대금업을 금했으나 종교적인 이유로 박해하지 않았다. 샤를마뉴는 782년 개종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킨 작센족 4500명의 목을 벴다. 30년 동안 18회 출정한 끝에 샤를마뉴는 작센족을 785년에 정복하고 강제 개종작업에 착수했다. 얄궂게도 작센족은 훗날 가톨릭교회와 긴밀한 관계였던 신성로마제국의 주축이 된다.

814년 1월 28일 샤를마뉴는 병석에 누운 지 7일 만에 사망했다.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그의 제국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중세 왕국이 들어섰다. 샤를마뉴의 후손들에겐 수성(守成)에 필요한 자질이 없었다. 샤를마뉴는 왕위를 아들 셋 중 유일하게 생존한 ‘경건왕’ 루이(Louis the Pious)에게 물려줬다. 샤를마뉴는 813년 루이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며 후계를 준비했다. 루이는 영리했으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나 그의 별명이 알려주는 것처럼 신앙심이 지나쳤고 아버지의 리더십 자질을 물려받지 못했다.

잘못이나 한계는 샤를마뉴에게도 있었다. 샤를마뉴가 주도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로마 문화, 기독교 문화, 게르만족 문화의 융합을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 이슬람 문명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샤를마뉴는 ‘로마인의 황제’였으나 지극히 프랑크적 인물이었다. 그는 화려한 로마 복식 대신 프랑크족의 소박한 옷을 입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세련된 사람은 아니었다. ‘수준 높은’ 아부가 아닌 생경한 아부라도 들으면 좋아했다. 충성서약 관계로 맺어진 군주와 귀족의 관계는 중세 봉건주의의 기원이 됐다. 샤를마뉴가 단행한 화폐 통일이 가능케 했던 시장의 발전은 그가 사라지자 원동력을 상실했다.

샤를마뉴는 4명의 아내 중 2명을 뚜렷한 이유 없이 내쳤다. 그는 10명의 처첩 중 8명과 20명의 자식을 뒀다. 샤를마뉴는 814년 가톨릭교회의 복자(福者)가 됐다. 1166년에는 대립교황(對立敎皇·antipope) 파스칼 3세가 그를 시성(諡聖)했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꿈은 샤를마뉴가 남긴 최대의 유산이다. 샤를마뉴 제국의 수도는 아헨이었다. 지금 샤를마뉴는 유럽연합을 출범시킨 조약(1991)이 체결된 마스트리흐트로부터 50㎞ 떨어진 아헨대성당에 묻혀 있다.



샤를마뉴
742년께 지금의 벨기에 지역에서 출생
768년 동생 카를로만과 프랑크 왕국의 ‘ 공동 왕’으로 등극
771년 카를로만 사망
800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 로마인의 황제’로 등극
814년 지금의 독일 아헨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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