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관음이 피서 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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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한낮의 정상은 외롭다.

올라오는 사람마다 몇 모금 남지 않은 물을 털어 넣고, 아담한 돌담불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서둘러 하산했다. 패러글라이더도 올라오자마자 두둥실 날아 내리기 바빴다.

설악…. 강원도가 아닌 경기도의 설악면에 있는 마유산(통칭 유명산) 정수리 부근은 이름대로 말이 뛰놀았음직한 억새 고원이다.

용문산.어비산.중미산.소구니산이 건너다 보이고 북한강.남한강이 내려다보이며 수락산.도봉산이 아스라하다.

그 초원과 전망으로도 등산객의 발길을 오래 붙들지 못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내리쬐기 때문이다.

계곡에 가고 싶다. 하산하는 사람들은 물이 그립다. 유명산은 본디 입구지 계곡으로 유명하다.

달구지 아저씨라고 적어 놓은 택시 기사가 씨를 뿌린 하양.분홍.빨강.보라색의 코스모스 꽃과, 억새 잎으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는 노란 원추리 몇 송이가, 바쁜 마음을 잠깐 눅여 준다.

길게 이어지는 참나무 계단 길을 내려서자 숲 속에서 물소리가 난다. 쫄쫄쫄, 하는 소리를 귀가 듣기 전에 탑탑한 입이 먼저 빨아들인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 납죽 엎드려 계곡이 발원하는 물길을 목구멍으로 돌린다.

숲 속에서 한동안 넉장거리하고 있자니 으스스 냉기가 받쳐 다시 걷는다. 돌길이 이어지는데 그것 참, 고약해라. 뒤뚱거릴 때마다 뱃속에 담긴 계곡 물이 꿀렁거린다.

넓고 깊은 소가 눈길을 끈다. 마당소가 분명하다. 소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산천 교향악이다.

돌돌졸졸졸콸콸콰르르르…. 아니, 이 소리가 아니다. 도저히 글로 흉내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혹 악보로는 담아낼 수 있을까. 산에 물기가 촉촉한 덕이겠다. 쭉쭉 뻗은 단풍나무의 둥치가 참나무만큼 굵고 키는 더 훤칠하다.

손바닥 같은 파란 풍엽을 일제히 흔든다. 천수관음(千手觀音) 이 피서를 왔는가.

용소를 지나 숲 동굴 아래 피서객이 보인다. 계곡 한가운데의 큼직한 바위에 남녀가 등을 대고 앉았다. 서로 심장 박동이라도 세고 있는지 말이 없다. 사람들 눈길을 피해 제일 위까지 올라온 연인이 틀림없다.

한참 아래에선 아가씨들의 요란한 물싸움에 물보라가 인다. 청바지가 녹수에 흠씬 젖어 짙푸르다.

초입 박쥐소 위아래는 가족들 물놀이 터다. 꾀벗은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다. 아버지는 반석 위에서 다리를 꼰 채 잠들었고 어머니는 옆에서 책장을 넘긴다.

남의 발길 머물지 않는 정상만을 꿈꿀 일은 아니겠다. 누구나 다가와 발을 담글 수 있는 계곡 하나쯤 가슴에 간직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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