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판사들에게 말조심을 기대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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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판사가)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street) 시위에 대한 견해를 표명한다면 윤리강령 위반으로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법원 주최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서울에 온 린 리보비츠(미국) 판사가 본사 기자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판사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정치적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해 견해를 표명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온 장피에르 봉투 검사는 판사 노조가 있어 집단행동을 허용하는 프랑스에서도 대부분 입법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을 비난하는 책을 쓴 판사가 징계를 받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들은 “윤리강령과 상관없이 특정 이슈에 편파적 의견을 갖고 있다는 평판 자체가 치명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을 금지하는 규정은 없어도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양새를 만들지 말자는 생각에 아예 쓰지 않거나(리보비츠 판사), 페이스북에 자신이 맡았던 사건 관련 기사나 칼럼을 올리는 정도(봉투 검사)에서 끝낸단다. 판사들은 어느 나라에서든 ‘말조심’을 해야 하는 직업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지난달 22일 최은배 인천지법 부장판사가 페이스북에 ‘한·미 FTA’ 반대 글을 올린 후 불거진 판사들의 정치적 의견 표명 정당성 논란이 2주가 넘도록 방향도 잡지 못한 채 증폭되고 있다. 대법원장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더 나아가 한 판사는 “쫄면 시켰다가 가카의 빅엿까지 먹게 되니. 푸하하”라며 대통령 조롱 글까지 SNS에 올리는 실정이다.

 이쯤 되니 판사들의 정치적 견해 표명 자제를 기대하는 건 고사하고, 품위 있는 언어를 바라는 것조차 힘들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판사들이 좀 더 신중하고 무겁게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건 그들이 어쨌든 우리 사회 갈등의 마지막 판단자라는 직분 때문이다. 판사들이 이토록 참을 수 없이 가볍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 후 국민들이 과연 그들의 판결을 무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생각하면 걱정스럽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