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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 김수현이 쓰면 통속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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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기억을 잃어가는 서연(수애·오른쪽)과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려는 지형(김래원)의 사랑을 담은 드라마 ‘천일의 약속’. 사랑과 기억에 대한 주옥 같은 대사로 “역시 김수현이다”라는 평을 받고 있다.

‘천일의 약속’은 김수현 작가의 연륜이 담긴 수작이다. 극의 구성·전개뿐만 아니라 작가의 관록이 발휘된 대사를 곱씹어보면, ‘김수현 문체’다운 말맛을 느끼게 된다. 드라마는 희귀성 치매에 걸린 서연(수애)과 그에게 헌신하는 지형(김래원)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유별나다면, 젊은 서연이 희귀성 치매를 앓는다는 점인데, 작가는 자신에게 느닷없이 몰아친 비극에 대처하는 한 젊은 여성의 심리와 그녀를 대하는 주변 인물의 태도에 관심을 둔다. 여주인공 의식의 추이와 더불어 사라지는 삶의 빈자리를 채우는 다른 삶에 대한 관심이다.

김수현

 작가의 의식은 ‘사랑의 약속’과 깊게 관련된다. 작가는 일시적이고 유한하고 유행하는 사랑이 아니라 오래되고 무한하고 근원적인 사랑을 천착한다. 다시 말해 ‘천일의 약속’은 제목이 암시하듯, 인간의 소중한 가치로서 굳게 지키고자 하는 ‘오래된 사랑의 약속’에 집중한다.

 ‘오래된 사랑’에 대한 믿음은 수정(김해숙)이 서연을 찾아와 아들과 헤어질 것을 간곡히 당부하자 서연이 답하는 말, “그럼요,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에 이르러 그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난다.

 이 ‘오래된 사랑’의 의미는 이 땅에서 참으로 오래된 어미 마음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 생명을 점지해주는 삼신할미의 신화만큼이나 ‘오래된 영혼’의 형식으로 전해져 왔다. 곧 ‘천일의 약속’은 이 땅에서 아득하게 이어져 온 ‘오래된 사랑’의 가치에 대한 굳은 약속을 보여준다. 늘 현아(이미숙) 앞에서 쩔쩔매던 수정이, 서연을 ‘치매’라 모욕하는 현아(이미숙)에게 물을 끼얹었을 때의 마음도 바로 ‘오래된 사랑’, 그것이다.

 김수현의 구어체 문장에는 여러 문체가 뒤섞여 있다. 특히 같은 말의 반복은 김수현의 내밀한 문체의식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말의 반복은 말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속세에 찌든 마음의 더께를 말끔히 씻어내는 기도거나 주문에 가까운 반복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예, 서연이 자신에게 순수한 사랑을 바치는 지형에게 하는 말. “사랑해 고마워 미안해 생각날 때 또 할래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또, “(지형)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받아주어 고맙습니다. (서연)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받아주어 고맙습니다.”

 이 경우 치매 환자의 자의식을 반영한 말의 반복이거나 결혼식 서약에서의 반복이지만, 이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같은 비근하고 ‘오래된 말’의 반복은 ‘오래된 사랑’의 가치를 신뢰하는 작가의식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오래된 말의 반복을 통해 속세에 찌든 고단한 시청자들은 잠시나마 정화의 체험을 하게 된다. 비근하고 일상적인 말을 아주 ‘오래된 사랑의 말’로 영롱하게 바꾸는 언어를 김수현의 TV극 언어는 통속성의 테두리를 훌쩍 벗어나 종종 영혼의 힘을 지닌 언어임을 드러낸다. 바로 여기에 김수현 드라마의 깊은 문학성이 있다.

 극중 홍길(박영규)과 현아 부부는 속물의 화신이고 우리는 그런 속물근성과 얼키설키 살아가야 한다. 드라마는 이 타락한 세속을 극복하는 길은 ‘오래된 사랑’의 의미와 가치를 밝히는 데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특히 타락한 세속의 삶에 깊이 얽매어 살던 지형 어미 수정이 차츰 자식 사랑을 넘어서 서연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 더 넓고 깊은 생명에 대한 사랑의 ‘어미’로 변신해가는 모습은 그 자체가 이 땅에서 살아온 모든 어미들의 ‘오래된 사랑’을 한없이 신뢰하는 작가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다.

 ‘천일의 약속’은 말한다. 사랑은 습득하는 것이 아니요, 선천적이고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이 땅에서 삼신할미 이래로 오래된 사랑의 신명이 끝없는 인간생명의 고리를 엮어왔듯이.

임우기(문학평론가)

◆김수현=1943년 충북 청주 출생. 1968년 MBC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로 데뷔. TV드라마 ‘사랑과 야망’(1986), ‘사랑이 뭐길래’(1991), ‘목욕탕집 남자들’(1995), ‘청춘의 덫’(1999), ‘부모님 전상서’(2004), ‘내 남자의 여자’(2007), ‘엄마가 뿔났다’(2008), ‘인생은 아름다워’(2010) 등.

월화 드라마 인기 내 손에…김수현·노희경 작가의 힘

김수현(68)과 노희경(45)-. 대한민국 드라마를 이끄는 중심축 중 하나다. 이름만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몇 안 되는 드라마 작가로 분류된다. 이른바 드라마 ‘작가주의’를 주도하고 있다.

 가슴을 콕콕 찌르는 듯한 대사와 폭넓은 소재 선정으로 작품마다 화제가 되는 김수현,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끝까지 파고들어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한 노희경. 그들이 요즘 월·화요일 안방극장을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가슴 저미게 물들이고 있다. 화제의 작품은 김수현의 ‘천일의 약속(SBS·밤 9시55분)’과 노희경의 ‘빠담빠담(JTBC·밤 8시45분)’이다. 각기 밤 9, 10시간대를 책임지고 있다.

 현재 방영 4회 만을 남겨둔 ‘천일의 약속(20부작)’은 시청률 15%를 기록하며 ‘김수현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5일 첫 방송한 ‘빠담빠담(20부작)’은 종합편성채널 중 최고 시청률(1.7%, AGB닐슨 전국 가구)로 시작했다. 케이블 1.7%는 통상 지상파 15%에 버금가는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두 드라마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문화계 전문가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한편 1일 개국한 JTBC 프로그램들은 6일에도 종편 4사 가운데 시청률 상위를 석권했다.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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