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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와 10시간 이나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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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통' 과 '퉁퉁퉁' 의 다른 점은?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의 차이다. 전자가 발랄.경쾌하다면 후자는 신중.묵직하다. 그러나 여운은 후자가 길게 남는다.

연기자 이나영(21). 그녀는 CF모델.탤런트.영화배우란 타이틀을 거부한다. "그냥 연기자로 불러주세요. " 어느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단다.

비유컨대 분명 음성모음이다. 길거리에서 청소년 잡지모델로 픽업된 지 2년 만에 소리 소문없이 연예계의 정상에 서게 됐다.

브라운관에선 사이버 시대의 선두주자로 각광받지만 실제로 만난 그는 '국화 옆에서' 의 여인처럼 방정하다.

10시간을 함께 한 기자에 대한 부담감이 컸을까. 말끝마다 '녜' '요' 를 빠뜨리지 않는다. 욕설이 들어간 영화는 극장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하니…. 연예인에게 단골메뉴인 '끼' 도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n세대 최고의 스타? 수수께끼다. 아니 불가사의다.

#1 #1. 가을바람

광고는 계절을 앞서간다. 사실 이나영을 널리 알린 것은 드라마보다 CF. 청바지.휴대폰.화장품.초콜릿.샴푸 등. CF의 한복판에 있는 그가 계절을 앞질러 가는 것은 당연하다.

폭염으로 푹푹 찌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한 CF촬영장. 그가 전속으로 있는 가을용 화장품 홍보물 촬영이 한창이다.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난 고된 작업. '자본주의의 총아인 광고는 그의 몸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매끈하게 뻗은 우유빛 다리, 빨려들 것 같은 고혹적 눈빛, 가지런하게 정렬된 입술 등 구석구석 찍어댄다.

'레디' '액션' 사인에 일순의 짜증도 없이 포즈를 취하는 이나영. 양볼에 귀여운 보조개가 번지며 환하게 웃을 땐 천진한 소녀 같지만 고개를 들며 큰 눈망울로 카메라를 응시할 땐 먹이를 찾는 표범처럼 섬뜩하다. 자줏빛 아이섀도우에 반짝임이 섞인 베이지색 립스틱이 올 가을의 색조를 예고한다.

#2 남과 여

"인터넷에 특기가 수영.피아노라고 써 있던데…. " "아, 그거요. 별로 할 말이 없어서요. 초등학생 때 배웠지만 실력은 그저 그래요. "

이나영은 솔직하다. 이리저리 재는 법이 없다. 덜 다듬어진 사내아이를 마주한 것 같다. 매사가 털털하다.

오토바이에서 사진을 찍었다. 앉을 자리에 먼지가 쌓여 닦으려고 하니 선수를 친다. "그냥 두세요. 뭐 그런 걸 신경쓰세요. "

하지만 그는 여린 숙녀다. 아직도 거울을 보며 얼굴투정을 한다. "못생겨서 거울을 싫어해요. " 입술이 뾰로통해진다. 큰 촬영이 있으면 물 한모금도 삼키지 못하는 겁쟁이다.

점심으로 나온 닭도리탕에서 닭발이 튀어나왔다. "아이! 끔찍해. "따로 라면을 시키더니 숟가락에 돌돌 말아 입으로 쏙 집어넣는다. 한국통신 메가패스 광고에 나오는 '여제왕' 맞어? 자웅동체의 묘한 매력이다.

#3 조선시대

묻지도 않았는데 별명을 줄줄이 댄다. 조선시대.애늙은이.58년생 등. 요즘 아이들과 거리가 먼 단어다. "노래방에 가나" "테크노바는 가나" 는 물음에 연신 "아니요" 다. 별종이다.

"즐겨 듣는 음악은?" "괴성 등 시끄러운 것만 없으면 돼요. 피아노.기타 반주곡이 편해요."

"화장은 자주 하나" "눈썹 한번 그려본 적이 없어요. 남들이 알아서 해주잖아요." 정말 속 편하다. 단도직입으로 찔러댔다.

"무슨 재미로 사나. " "제 스타일이예요. 튀어야만 연예인인가요. 덜렁덜렁 힙합바지보다 청바지에 티셔츠가 더 싱싱하잖아요. "

연예사이트 MCC21 한연희 기자의 분석. "n세대는 자신과 다른 것을 좋아한다. 이나영의 수더분함이 그들에겐 이국적이다. 고요한 이미지가 튀는 신세대에게 오히려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4 매직파워

"정말 영화를 해보고 싶었는데…. " 이나영은 소원을 이뤘다. 지난해 영화 '에이지(英二)' 로 일본진출 한국배우 1호를 기록했던 그는 요즘 연말께 개봉할 한국영화 '천사몽' 에서 홍콩배우 리밍(黎明)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사진모델에서 출발해 드라마.CF를 거쳐 영화까지 스타탄생의 정석을 밟은 것이다.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퀸' 에서 노출됐던 유약한 모습을 던져버리고 총.칼을 휘두르는 여전사로 나온다. 촬영이 힘들었는지 온몸이 멍투성이다.

영화얘기를 꺼내자 투명한 눈빛이 더 반짝인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분위기다. 아래 쪽으로 튀어나온 이마, 포물선을 그리며 오똑하게 솟은 코에서 신비감이 느껴진다.

"처음엔 공주역이었어요. 그런데 얼굴만 예쁘지 개성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기획사의 반대를 뿌리치고 여전사를 택했어요. "

20년 동안 톱탤런트를 매만진 메이크업 아티스트 왕석구씨의 말. "차분한 외모에서 독특한 카리스마가 발산한다. 뭔가 빈듯 하면서도 사람을 위압하는 마력이 있다. 하지만 꽉 닫힌 가슴을 열고 정열의 바다로 뛰어들어야 천의 얼굴의 가진 연기자로 거듭날 것이다. "

#5 일문일답

연기가 맹숭맹숭하다.

"아직 연기를 잘 모른다. 날마다 배우는 자세다. 정확한 발음을 위해 입에 볼펜.코르크 마게를 끼고 연습한다. 구부정한 자세를 펴려고 하루 30분 가량 벽면에 등을 딱 붙이고 서 있는다. 캐릭터 일기도 쓴다. 상상력을 발휘해 등장인물의 성격을 나름대로 분석한다. 내년께 연기관련 학과에 편입할 계획이다."

누구를 좋아하나.

"개성 강하고 연기력이 풍부한 사람이다. 선배로선 고두심, 후배로선 양미라가 좋다. 고소영 언니의 이미지도 부럽다. '퀸' 에서 함께 출연했던 이미숙.김원희 선배와 친하다. 외국배우론 어려서부터 오드리 햅번을 존경했다."

스타가 된 소감은.

"스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직 멀었다. 일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도 때론 지쳤다는 느낌도 든다. 매일 매일 '참을 인(忍)' 자를 되새긴다."

스트레스가 클 텐데.

"별다른 해소책이 없다. 그냥 혼자 운다. 부모님이 속 상할까 봐 집에선 일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친한 사람들에게 속을 털어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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