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풀리지 않으면 이 책을 읽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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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 님을 만나러 홍대 앞으로 간다. 정말 땡볕이다. 나뭇잎 하나 꼼짝하지 않는다. 작렬하는 태양빛이 정수리에, 동공에 내리꽂힌다. 순간 햇살 한 줄기가 머리 속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휘청, 방아쇠를 당기는 손의 움직임을 느낀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느꼈을 살인에 대한 짜릿한 충동을, 지하철 역에서 홍대 앞까지 가는 그 짧은 길 위에서 느낀다.

손에 와닿는 차가운 금속 물질의 유혹. 하성란 님은 녹음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단정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 서글서글한 큰 눈망울, 사각사각 소리 나는 연한 옥빛 긴 치마. 참 단아하다.

"원고 마감하느라 한동안 정신 없었어요." 지난해 하이텔에 연재한〈삿포로 여인숙〉을 단행본으로 낸다고 한다. 내달쯤 출판사 자음과모음을 통해 볼 수 있다고.

"무슨 책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무라카미 류 소설 들고 나왔어요." 그러면서 두 권짜리〈코인로커 베이비스〉를 들어 보여준다. 의외다. 마약, 섹스, 동성애 등 파격적인 주제를 주로 다루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이라니. 하기사 하성란 님은 이미 〈곰팡이꽃〉에서 옆집 여자가 버린 쓰레기 봉투를 밤마다 들춰보는 엽기적인 남자의 이야기를, 박제된 현대인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내지 않았는가.

"코인로커 아시죠? 지하철에서 동전 넣고 물건 보관하는 사물함. 그곳에 태어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갓난애기들이 버려져요. 그때까지 68명의 아이들이 버려지는데 단 두 명만이 살아남죠. 기쿠와 하시. 이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함께 자라다 쌍동이로 입양돼요. 주사위 놀이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들의 유년시절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죠."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을 읽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생의 깊은 우물에서 묵직한 두레박을 잡아당겨 물을 퍼올린 것 같다면서.

숲이 빼곡한 거대한 산림을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코인로커 베이비스〉. 하성란 님은 글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 책을 책꽂이에서 꺼내 아무 페이지나 읽는다고 한다.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아무 때나 〈위대한 개츠비〉를 펼쳐서 읽는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처럼, 〈코인로커 베이비스〉를 한 바탕 읽어볼 일이다.

오현아 Books 기자(perun@joins.com)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들
* 코인로커 베이비스(무라카미 류 지음, 양억관 옮김, 도서출판 삼문 펴냄)
* 이방인(알베르 까뮈 지음, 김화영 옮김, 책세상 펴냄)
* 곰팡이꽃(하성란 등 지음, 조선일보사 펴냄)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열림원 펴냄)
* 위대한 개츠비(피츠제럴드 지음, 정현종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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