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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ISSUE] 춤바람 난 재벌 딸 “내 여성성에 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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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바람입니다. 받은 속을 식히는 건들바람이고, 고된 삶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주는 산바람이고, 잠든 가지에 새순을 돋게 하는 봄바람입니다. 또 소녀의 꿈을 상기시키는 꽃바람이기도 합니다. f가 ‘춤바람’에 빠진 여성들을 만나봤습니다. 춤을 추면서 예뻐졌고, 건강해졌고, 자신감이 생겼다는 사람들입니다.

구자홍 LS그룹 회장의 장녀 구진희(채원컨설팅 대표)씨가 스웨이 댄스 아카데미 류건후 원장에게 왈츠를 배우고 있다.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끼 있고 노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잘할 것 같지요? 절대 아니에요. 인내심 강한 사람들만 춤을 끝까지 배울 수 있어요. 일종의 수련이거든요.”

춤 배우는 여성들을 만났다. 이들은 스스로를 ‘수행자’라고 했다. 재미로 시작하지만 수행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수행이라 해서 늘 힘든 건 아니다. 음악을 들으며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훈련은 신선하고 흥겨운 경험이 된다. 수행을 거쳐 얻은 깨달음의 열매도 달콤하다. 자기를 재발견하며, 스스로 정화되는 체험을 한다. 억눌렸던 감정을 풀어내는 효과도 크다. 몸도 건강해진다. 폐활량이 커지고, 다리 힘이 강해진다. 끊임없이 춤 예찬론을 펼쳐놓는 이들에게서 ‘나를 바꿔놓은 춤 이야기’를 들어본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왈츠 동작을 연습하고 있는 구진희씨.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움직임에 몰입하느라 춤을 추는 동안에는 딴생각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긴 생머리. 구진희(34)씨가 태어나 처음으로 해본 헤어스타일이다. 3년 전부터 진희씨는 댄스 스포츠를 배운다. 그러면서 진희씨는 예.뻐.졌.다. 예쁘게 꾸미는 데 신경 쓰게 됐고, “예쁘다”는 말이 기분 좋게 들리기 시작했다.

 “예전엔 나도 모르는 사이 ‘여성적으로 보이지 말아야지’란 마음을 먹었나봐요. ‘섹시해서 남자들이 쳐다보는 여자’는 어쩐지 부정적으로 생각됐죠. 예쁜 것, 여성적인 것… 누가 막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거부했던 세계였어요.”

 진희씨는 구자홍 LS그룹 회장의 1남1녀 중 맏딸이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과를 졸업한 뒤 패션학교 에스모드를 나왔고, 현재 채원컨설팅을 운영하며 미술 전시기획과 큐레이팅을 하고 있다. 이른바 ‘재벌 딸’에 서울대 출신, 그리고 최고경영자… 성취 지향적 삶이 그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남성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거죠. 사업을 하다 보니 여성 경영인들을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분들도 저처럼 살더라고요. ”

 새로운 취미생활로 시작한 춤이 그 틀을 깰 줄은 몰랐다. 진희씨는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서울 삼성동 ‘스웨이 댄스 아카데미’에 들러 류건후 원장에게 개인레슨을 받고 있다. 댄스 스포츠 종목 열 개 중 왈츠·탱고·퀵스텝·룸바·자이브·차차차 등 여덟 종목을 섭렵했다.

 춤을 배우며 “예쁘게 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손끝도 예쁘게, 발끝도 예쁘게, 허리 선도 예쁘게 만들어야 했다. 진희씨는 “처음엔 ‘이거 해야 하나’란 거부감이 들었다”고 했다. ‘예쁜 척’은 내 옷이 아닌 듯 어색하기만 했다.

 예쁘게 보이려는 훈련은 실제 진희씨를 예쁘게 바꿔놨다. 주변에서 먼저 알아봤다. 몸매가 달라졌네, 손짓이 달라졌네 등 “여성스러워졌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진희씨는 “‘내 안에도 여성성이 있구나’ 싶어 스스로 놀랐다”고 말했다. 진희씨가 한동안 몰두했던 명상처럼, 춤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효과적 매개체가 됐다. 숨기려고만 했던 여성성이 자신의 소중한 자산임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늘 리더십의 중요성만 되새겼던 진희씨에게 춤은 ‘팔로어십(followership)’의 가치도 가르쳐줬다.

 “춤을 출 때는 남성이 리더(leader), 여성이 팔로어(follower)예요. 팔로어는 리더보다 0.5초 정도 늦게 스텝을 밟죠. 처음엔 ‘따라 하라’는 지시가 당혹스럽게 들렸어요.”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이 되라는 주문에 익숙한 진희씨는 “남녀평등사회에서 여성이 주도적으로 정할 수 있는 스텝이 없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실제 춤을 배우며 팔로어라고 해서 리더가 이끄는 대로 생각 없이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리더의 의중을 잘 헤아리되 자기 자신의 무게중심을 정확히 지켜야 조화로운 춤이 완성됐다. 리더와 팔로어가 호흡을 맞추는 데는 배려와 존중이 필수였다. “팔로어 역시 리더 못지않게 제 몫이 중요한 역할”이라는 게 진희씨의 깨달음이다.

 춤을 배우며 진희씨의 몸은 한결 유연해졌다. 동시에 마음도 유연해졌다. 융통성이 생겼고, 긍정적 성격으로 바뀌었다.

 “어려서부터 ‘FM(Field Manual·군대용어 ‘야전교범’의 약자)’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어요. 실수하지 않으려 안절부절못했죠. 하지만 한 번 스텝이 틀렸다 해도 지나간 스텝은 잊고 지금의 스텝과 남아 있는 스텝에 충실해야 하는 춤의 원칙을 삶에 적용시키니 행복하고 감사할 일이 훨씬 많아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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