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으로 열차 멈춘 그날 어느 고교생 꿈도 멈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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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인천에서 의정부로 가던 열차가 구로역에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자 승객들이 선로로 뛰어내리고 있다.

"그 날 아침 열차만 멈추지 않았더라면…." 경기도 시흥시 소래고등학교 3학년 이희준(18)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렇게 한탄했다. 그는 철도파업으로 대학진학의 꿈을 접어야 할 위기에 몰렸다.

이 군은 27일 오전 7시 소사역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렸다. 서울대 농생명공학과의 2차 전형인 면접을 보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그는 1차전형을 통과한 상태였다. 하지만 10분, 20분, 시간은 흘러가는데 열차가 오지 않았다. 이 군의 입술은 바싹바싹 말라갔다.

오전 9시까지 면접장에 도착하려면 7시30분 전에는 열차를 타야했다. '소사에서 신도림까지 15분, 신도림에서 다시 서울대입구역까지 15분, 갈아타는 시간 10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시간 계산으로 가득찼다. 그 때였다. '구로역 전동차 사고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여러분의 양해를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구로역의 이날 사고는 철도 파업 이틀째를 맞아 투입된 대체인력인 군 기관사가 구로역의 지리를 몰라서 생겼다. 진출로로 나가야 할 차량을 진입로로 잘못 몰고 간 것이다. 이 때문에 인천과 수원발 청량리행 모든 열차가 40~60분 가량 지연됐다.

이 군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부모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형편이 넉넉치 못한 이 군 부모는 아들을 배웅한 뒤 각자의 일터로 나선 뒤였다. 이 군 어머니는 "서울대에 전화했는데 다른 학생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꼭 9시까지 와야한다고 하더라"며 야속해했다. 아들에게 전화해 침착하라며 버스를 타라고 일렀지만 쿵쾅거리는 마음을 다잡기는 어려웠다. 승객들이 한꺼번에 몰린 버스 승강장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이 군은 서 너대의 버스를 놓친 뒤 가까스로 서울대에 도착했다. 9시 20분이었다. 면접은 불허됐다.

이 군이 서울대 진학에 매달린 것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다. 서울대에 진학해야 시흥시가 주는 입학금과 4년간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그는 현재 다른 명문 사립대의 기계공학과 특별전형도 통과했지만 입학금(800만원)과 매학기 등록금(600만원)때문에 다닐 엄두를 못내고 있다.

소래고 홍원표 교장은 "희준이는 자연계열 전교 1등으로 면접만 봤다면 서울대 입학은 문제없었을 것"이라며 "철도노조에 이 군 인생에 손해배상이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군 부모는 "남들은 다 자가용으로 태워다 주는 데 형편이 어려워 혼자 전철을 태워보낸 못난 부모가 죄인"이라며 가슴을 쳤다. 이 군은 "그 날 아침 멈춘 열차로 내 인생도 멈춘 듯하다"고 말했다. 3일로 철도파업은 8일째를 맞았다. 희준이는 어쩌면 평생 파업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할 지도 모른다.

장정훈 기자 cchoon@joongang.co.kr

  • [알려드립니다] 중앙일보 2009년 12월 4일 1면 ‘파업으로 열차 멈춘 그날 어느 고교생 꿈도 멈췄다’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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