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중립? 그건 거짓 통념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이 묵직한 신간을 두번이나 재우쳐 읽었다.

매끄러운 번역에 힘입어 쑥쑥 읽히는 책은 '학술서 맞아?' 싶었고, 읽는 작업 자체가 행복했다.

서유럽이 탈(脫)현대로 돌아서는 핵심기점인 1968년 혁명 이후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현대학문의 방향 역시 '멋진 신세계' 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는 탁월한 인류학 서적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와 진리〉는 우선 자기 아내의 죽음 이후 저자가 느낀 비통함 등 사적인 얘기를 의도적으로 곳곳에 집어넣은 서술방식부터 별나다.

학술서는 건조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는 스타일상의 실험을 넘어 저자는 '학자〓가치중립적 관찰자' 라는 막스 베버 이후 서양 학문의 방법론 자체를 보편주의의 허구라고 지적한다.

외려 학자라면 정치적 소신을 학문 속에 담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는, 시대착오적으로 들릴 법한 주문까지 던진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이 책이 포스트모더니즘 방법론에 따른 서적이라고 짐작할 것이고, 동양세계와 관련한 유럽학문의 고정관념을 부정했던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 〈오리엔탈리즘〉을 연상할 것이다.

그런 예감은 옳다. 그러면 이 책은 제3세계 학자의 '한번 던져본 목소리' 일까? 웬걸 〈문화와 진리〉는 인류학의 혁혁한 신고전이다.

저자 레나토는 미국인류학회장을 지낸 스탠포드대 석좌교수. 따라서 이 신간은 미국의 주류 아카데미즘이 이토록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물이다.

저자의 핵심 메시지는 이렇다.

60년대말 이후 미국사회는 제3세계의 등장, 페미니즘과 소수인종 등 마이너리티의 부각 이후 더 이상 예전의 미국이 아니다.

고전적 인류학이 '가치중립적 방법론이라는 붓대롱' 으로 관찰해오면서 '미개한 사회' 로 규정해온 제3세계도 변했다.

현재의 제3세계는 '시간이 정지된 자기충족적인 문화' 이기는 커녕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무수한 경계넘기와 이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과학이 서야할 자리는 '문화의 유형' 을 분류하는 한가한 작업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 유형 사이의 경계와 교차로'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은 바다 건너 외국의 고답적이며 한가한 학술 차원의 문제에 불과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당장 우리 인문사회과학계의 몇몇 쟁점에 강력한 암시를 던져준다.

즉 김영민교수가 한국 지식인들의 매판성을 조롱한 용어인 '먹물〓기지촌 마인드' 논쟁에 엄호사격을 해준다.

서양 자체가 자체의 변화물결에 따라 무한변신을 하고, 성역인양 보존해왔던 자기의 지적인 전통에까지 과감한 의문을 던지는데 왜 우리는 서양 보편주의를 '움직일 수 없는 신조' 로 삼고 있는가.

그렇다면 조동일 교수의 말대로 박지원의 호질(虎叱)같은 우리 전통의 다양한 글쓰기, 논문작성의 전통을 독자적으로 실험해볼 만하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학문방법론은 한국같은 제3세계에게는 단순한 해체 같은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지식구축의 효율적인 틀이라는 점도 일깨워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