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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수도원 순례기 <중>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 무소유로 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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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아시시의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동상. 그 앞에는 프란체스코의 허리띠가 보관된 유리병이 놓여 있다.

가톨릭 수도원의 역사에는 두 산봉우리가 있다.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체스코’다. 5세기에 살았던 베네딕도(480~547)는 서양 수도원의 기틀을 다졌고, 13세기에 살았던 프란체스코(1182~1226)는 무소유의 삶으로 수도원의 영적 지향을 지폈다. 베네딕도는 독일인, 프란체스코는 이탈리아인이다.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가장 사랑 받는 성인 중 한 명이다. 무소유의 삶,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았다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의 수도원에서 그의 영성을 노크했다.

 20일 로마에서 북쪽으로 3시간 가량 달렸다. 도착했을 때는 캄캄했다.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의 밤하늘에 별이 떴다. 하늘은 차갑고 별은 맑았다. 800년 전, 그도 저 별을 보았으리라. 젊었을 때 프란체스코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내로라하는 부자였고, 프란체스코는 놀만큼 놀았다. 다소 낭만적인 생각으로 전쟁에도 참전했다. 살육의 처절함에 몸서리쳤다. 프란체스코는 그렇게 젊은 날을 보냈다.

 전쟁에서 돌아온 프란체스코는 변했다. 집안의 돈과 물건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줬다. 아버지는 크게 노했다. 결국 아들을 대주교에게 고발했다. 재판이 열렸다. 군중 앞에서 프란체스코는 입고 있던 속옷까지 모두 벗었다. 그리고 “제가 가진 돈과 앞으로 받을 유산, 그리고 이 옷까지 모두 아버지에게 돌려드린다”며 집을 떠났다. 그가 벗은 것은 옷이 아니라 소유였다.

 그때부터 프란체스코는 ‘가난’과 결혼했다. 더 정확히 ‘가난한 마음’과 결혼했다. 그를 두고 “너무 비현실적이다. 도대체 지금 누가 그런 삶을 살 수 있겠나”라는 비판도 일었다. 하지만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 수사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 수 있을까.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사들이 허리띠를 매고 있다. 허리띠에 달린 세 개의 매듭은 청빈·순결·순명을 상징한다.

 이튿날 아침,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갔다. 대성당 안에 또 작은 성당이 있었다. 800년 전 프란체스코가 미사를 드리고 수도하던 좁은 공간이다. 각기 다른 복장의 수녀들과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대성당 안에는 성 프란체스코가 숨을 거둘 때 둘렀던 수도복 허리띠가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인은 돈이나 보물을 넣은 허리띠를 둘렀다. 일종의 전대였다. 프란체스코는 가장 단조로운 허리띠를 둘렀다. 청빈(淸貧)과 순결(純潔), 순명(順命)을 상징하는 세 개의 매듭도 묶었다. 수도자들은 지금도 그런 허리띠를 맸다. ‘가난한 마음’으로 하늘나라에 닿고자 하는 생명의 밧줄이다.

 아시시의 높다란 언덕을 올랐다. 성 다미아노 성당이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반쯤 허물어진 이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처음으로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야, 내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라.” 처음에 그는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벽돌로 성당을 다시 지으라는 뜻으로 알았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세속화로 시들어가는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으라는 뜻을….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프란체스코에겐 영적인 동반자가 있었다. 11살 아래였던 클라라 수녀였다. 아시시의 귀족 집안이었던 클라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프란체스코를 따랐다. 결국 수녀가 된 클라라 성녀는 나중에 이 성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성당 지하에는 성녀의 유해가 보존돼 있었다. 얼굴에는 평생 그가 좇았던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늑대와 비둘기, 들짐승에게 설교를 하고, 그들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걸 ‘특별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건 능력도 아니고, 비결도 아니다. 프란체스코는 예수의 눈, 예수의 마음으로 그들을 보았을 뿐이다. 창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현존을 보았던 것이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다시 말해 ‘이웃이 네 몸’이라는 예수의 눈에 그의 눈이 포개졌던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영적인 동반자였던 클라라 성녀의 유해. 훼손된 신체 일부는 세라믹으로 복원했다.

 언덕길을 오르다가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사들을 만났다. 물었다. “프란체스코 성인이 동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가 뭔가.” 수도원 생활지 51년째라는 구알띠에로 벨루치(67) 수사는 “성 프란체스코는 가난한 마음을 통해 에덴동산 때 아담의 상태로 돌아갔다. 숱한 수도 끝에 가장 원초적인, 원죄 이전의 인간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고 답했다.

 다시 물었다. “현대인의 일상상은 고단하다. 성 프란체스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뭔가.” 벨루치 수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과 일상을 당연시한다. 성 프란체스코는 달랐다. 그는 거기서 단순한 아름다움을 재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에 감사했다. 일상 매 순간의 아름다움을 알면 누구나 삶을 새롭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행복의 비결은 그렇게 간단했다.

 곁에 있던 동료 수사에게 물었다. “수도원의 수사들은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는가.” 프란체스코 데 라자로 수사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따르면 된다. 대신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행해야 한다. 그럼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프란체스코 당시 성서는 라틴어로만 읽혔다. 서민들은 읽을 줄도 몰랐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은 성직자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다. 프란체스코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 아시시 지방의 방언으로 그는 ‘평화의 기도’라는 찬미가를 지었다. 라틴어가 아닌 토스카나 지방의 방언으로 썼다는 단테의 『신곡』(1321년 완성)보다 100년 가량 앞선 시도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저를 당신의 도구로 삼으소서.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게 하시고,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게 하소서!” 그게 길이었다. 프란체스코가 현대인에게 던지는 단순한 길이었다. 지금도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즐겨 올리는 기도 중 하나다.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당시 처형장이었던 ‘죽음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

 아시시 언덕 서쪽 끝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으로 갔다. 지하 성당에 프란체스코 성인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석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무소유의 영성, 그 앞에서 소유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보였다.

 프란체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아시시의 처형장이었던 서쪽 ‘죽음의 언덕’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예루살렘의 처형장이자 공동묘지였던 골고타 언덕에서 숨진 예수의 최후까지 닮고자 했다. 실제 프란체스코는 그곳에 묻혔다. 나중에 그 위로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이 지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가장 남루한 곳, 프란체스코는 거기로 내려가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에 포개고자 했다.

 죽기 2년 전, 동굴에서 기도하던 프란체스코의 몸에는 오상(五傷)이 나타났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다. 지하성당을 나왔다. 옛 처형장에 섰다. 바람이 불었다. 그랬다. 프란체스코가 설한 십자가의 길은 거창하지도, 난해하지도, 험난하지도 않았다. “위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라!” 그렇게 단순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그토록 단순했다.

아시시(이탈리아)=글·사진 백성호 기자

◆성 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1182~1226)=유럽 중세 가톨릭의 ‘수퍼스타’다. 모든 세속적 가치를 포기하고 평생 청빈을 실천한 가톨릭의 성인(축일 10월 4일)이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하다. 무소유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던 그의 수도회는 중세 신분사회를 크게 흔들어놓았다.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꼬, 프란시스(영어식 표현) 등으로도 음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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