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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U 분실,도난 500건, 핵폭탄 원료 암거래는 현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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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호 06면

2006년 핵물질을 밀거래하려다 체포된 올레크 힌차고프(사진 왼쪽)와 그가 지니고 있던 고농축우라늄(HEU). 미국 당국은 이 HEU가 “핵무기 제조에 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루지야 내무부]

#1. 2006년 1월 31일 오후 2시.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 교외의 글다니 시장. 러시아 상인 올레크 힌차고프가 낡은 4륜 구동차를 몰고 나타났다. 건어물·소시지·조명기구 등 돈이 될 만한 것이면 품목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취급하던 보따리상이었지만 이날만큼은 그의 코트 안주머니에 아주 특별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50g씩 비닐주머니 2개에 나눠 담은 녹색가루, 그것은 바로 핵폭탄의 원료인 고농축우라늄(HEU)이었다. 암시장 네트워크를 통해 ‘매우 중요한 조직의 요원’이라는 터키인에게 1만 달러에 물건을 넘기기로 약속까지 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접선 현장에 나타난 사람은 그루지야 정부의 방사능물질 단속요원 아칠 파블레니시빌리였다. 옛 소련 지역에선 최근까지도 이 같은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1990년 초반 옛 소련 해체와 함께 일자리를 잃게 된 러시아인 과학자들에 의해 외부로 유출된 핵물질들이 아직까지 핵의 암시장에서 나돌고 있는 것이다.

내년 3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핵물질 관리체계 현실은

#2. 한때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펠린다바의 핵시설. 1만 볼트의 고압전기가 흐르는 담장으로 둘러싸인 철통보안의 요새다. 750㎏에 달하는 핵무기급의 HEU가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7년 11월 이 시설에 구멍이 뚫렸다. 2명의 무장괴한이 전기담장을 뚫고 감시장치를 무력화한 뒤 비상상황실에 침입했다. 비상요원들이 도착한 것은 45분 뒤였다. 괴한들은 보안요원 한 명을 총으로 쏜 뒤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다행히 HEU까지 탈취당하진 않았지만 괴한 2명의 정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두 사례는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산하 벨퍼과학국제문제연구소의 매튜 번이 지난해 펴낸 보고서 ‘폭탄 보호(Securing the Bomb)’에서 언급한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따르면 2009년 말까지 세계 곳곳에서 모두 1773건에 이르는 핵물질 관련 범죄가 일어났다. 핵무기로 전용될 위험이 있는 HEU의 도난 분실도 500건이었다. IAEA는 95년부터 핵물질 불법거래데이터베이스(ITDB)를 따로 운영하고 있다. ITDB가 집계한 숫자는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통보한 사례들만 모은 것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핵물질 밀거래나 도난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게 벨퍼연구소의 지적이다.

지역적으로도 옛 소련이나 중동 등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2001년엔 파리시내에서 핵물질 밀매업자들이 체포된 사례도 있다. 이들은 납 재질로 만든 원통형 케이스 안에 HEU를 담은 앰플을 보관하고 있다가 파리 경찰 당국에 적발됐다. 이들이 타고 있던 차량에서 비정상적으로 높은 방사능 수치가 나와 덜미가 잡힌 것이다.

분실 또는 도난당한 핵물질이 테러조직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전 세계는 핵테러의 위협에 휩싸이게 된다. 2006년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IAEA 사무총장(당시)은 “테러리스트들이 범죄 조직망을 이용해 핵물질 입수를 시도했다는 분명한 정황(clear signs)이 있다”고 밝혔다. HEU 25㎏ 혹은 플루토늄 8㎏만 있으면 초보적 수준의 핵폭탄 제조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벨퍼연구소의 보고서는 그루지야의 남오세티야 등 몇몇 지역을 ‘핵물질의 블랙홀’로 지목하고 있다. 러시아·그루지야 분쟁으로 인해 당국의 감시가 미치지 못하면서 구소련 시대 핵물질이 은밀히 유통되기 때문이다.

앞서 예를 든 보따리상 힌차고프의 사례는 핵테러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높여 준다. 핵물질을 손에 넣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미국의 시사잡지 ‘디 애틀랜틱’은 힌차고프가 “마치 일용 근로자들이 점심으로 때울 샌드위치를 비닐에 대충 둘둘 말듯 HEU를 비닐백에 담아 갖고 다녔다”고 표현했다. 그루지야 당국은 힌차고프의 HEU 순도가 낮아 핵무기 원료로는 쓰기 어려울 것으로 봤지만 그런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미국 당국에 분석을 의뢰한 결과 핵무기 제조용으로 적합한 수준의 HEU임이 드러난 것이다. 힌차고프는 이런 HEU를 “수㎏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밀매업자들은 어떤 경로로 핵물질을 입수하는 것일까. 옛 소련 과학자들에 의해 유출된 핵물질 이외에도 ^상대적으로 경비가 취약한 편인 연구용 원자로를 통해 핵물질을 입수하는 방법 ^원자력발전소 종사자에 대한 매수나 협박, 내부자 공모 등의 방법으로 핵물질을 빼돌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방법으로 유출된 핵물질이 밀매업자의 손에 들어가면 일은 커진다. 국제적 네트워크로 형성된 핵의 암시장을 통해 핵물질이 불법 유통되기 때문에 이를 단속·적발하고 핵물질을 회수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된다. 한충희 서울핵안보정상회의 부교섭대표는 “핵물질 밀매조직이 국제적으로 많이 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돈이 되면 무조건 사고 취급품목에 제한 없이 물품을 사고판다”며 “자신들이 거래하는 물품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테러조직인지 아닌지 이들에겐 상관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경우 원자력시설에 대한 보안이 삼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비교적 최근인 9·11 테러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그 이전엔 원자력시설에 대한 허술한 관리 실태가 드러나 감사에서 지적을 받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외부 침입자가 들어오는 경우를 가정해 가상훈련을 해 보면 쉽게 뚫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미 국방부는 최근 들어 핵테러를 안보 위협요소 1순위로 지목하고 있다.

핵물질의 불법 유통을 막고 테러집단의 손에 들어가는 걸 막는 것은 글로벌 어젠다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북한 등 특정 국가들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막는 비확산(nonproliferation) 못지않게 핵안보(nuclear security) 문제가 국제사회의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된 것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핵안보정상회의를 제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내년 3월에는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다. 한충희 부교섭대표는 “핵테러의 발생 가능성은 확률적으론 낮으나 일단 발생하면 전 세계적으로 참혹한 재앙을 맞게 된다”며 “오사마 빈 라덴 사망 이후 알카에다 내에서 권력 다툼이 있는 데다 테러조직 간의 호전성 경쟁 등으로 인해 핵테러 같은 극단적 방법을 쓸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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