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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법 개정안 공수표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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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김영신
한국소비자원 원장

지금은 인체에 미치는 약리학적 영향이 경미하고 부작용 우려가 없는 안전성이 확보된 의약품이라도 약국에서만 구입할 수 있다. 이것은 의약품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안전성 문제만큼이나 소비자가 필요할 때 의약품을 구입하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다. 이전에 아프면 밤늦은 시간이나 일요일에도 동네 약국들이 문을 열고 있어서 쉽게 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늦은 밤이나 일요일에는 조금만 아파도 병원 응급실이나,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는 당번 약국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2000년 의약분업 실시 이후 동네 골목에 있던 약국들이 병원 주변으로 집중됐다. 약국이 병원의 진료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닫으면서 의약품 구입 불편이 그 이전보다 많이 심해졌다. 특히 주말이나 심야시간 등 약국이 문 닫는 시간에는 아파도 참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비상용 의약품을 준비해둬야 하므로 불필요한 약값을 부담해야 한다. 약을 미리 구입해 두면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복용할 우려가 있고 아무 데나 버리면서 환경을 오염시킨다.

 한국소비자원이 2010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소비자의 80% 이상이 야간이나 공휴일에 약국이 문을 닫아 일반의약품을 구입하는 데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미국·일본 등 대부분의 선진국은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돼 전문지식이 필요 없는 대중적인 일반의약품은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한다. 미국에서는 10만 개 이상의 의약품이 일반 소매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95%에 달하는 일반의약품이 소매점에서 판매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일반약(OTC)의 약국 외 판매뿐 아니라 처방약에 대해서도 수년간 부작용 및 오남용의 우려가 적고 안전성·유효성이 검증된 처방약을 비처방약으로 전환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중적인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 문제를 논의했으나 약사회 등 관련 단체의 반대와 관계 기관 간의 입장 차이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물론 의약품은 화학적 합성물이므로 안전상의 문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소비자가 약국에서 감기약을 구입할 때 자신이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약을 지정해 약사에게 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소비자가 그만큼 약을 잘 안다는 뜻이다. 약사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중적인 의약품은 안전성 확보를 전제로 소비자의 선택권 보장과 편익 제고를 위해 약국 외 판매가 허용돼야 할 것이다.

 정부는 소비자가 가정 상비약을 수퍼마켓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지난 9월 30일 국회에 제출했다. 의약품의 안전관리를 전제로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 국회에서 이 개정안을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가정 상비약의 약국 외 판매 안전성을 확보했는지 검토가 필요한데, 의약품의 재분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개정안을 상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개정안을 보면 보건복지부 장관이 약국 외 판매 대상 약품 범위를 정해 고시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개정안이 통과돼도 복지부 장관이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는 가정 상비약을 지정할 때 의약품 재분류 결과를 충분히 반영해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마련돼 있다. 따라서 법률 개정안을 논의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미흡한 게 있으면 보완하면 된다. 약사법 개정안이 올해 국회를 통과해 소비자가 하루빨리 가정 상비약을 편리하게 살 수 있길 기대한다.

김영신 한국소비자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