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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물어주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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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오래전 돌아가신 내 어머니에겐 마흔 넘어 난감한 버릇이 생겼었다. 혼잣말을 하는 거였는데, 버스 안이나 병원 대기실처럼 자기 생각에 빠지기 쉬운 상황에선 예외 없이 그 증세가 나타났다. 평시라면 결코 입에 담지 않을 것들이었다. 원망, 악담, 때로는 욕설. 옆 사람에 들릴 만한 목소리로 불쑥 터져 나오는 그 말들로 인해 얼굴 붉어진 때가 적잖았다. 그런 엄마를 난 대놓고 타박하지 못했다. 어린 맘에도 저건 사는 게 힘들어서다, 그런 짐작이 든 때문이었다.

 마흔 언저리가 되면서 내게도 비슷한 증상이 생겼다. 머릿속 생각을 툭 내뱉곤 아차! 하는 일이 잦아졌다. 딱히 험한 내용은 아니지만 겁이 났다. 엄마처럼 되려는 걸까. 내가 왜 이러지? 며칠 전 책을 읽다 불현듯 그 이유를 깨달았다. 책은 미국 작가 캐스린 스토킷의 『헬프』다. 상영 중인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주인공인 흑인 여성 에이블린은 평생 하녀로 열일곱 명의 백인 아기를 길렀다. 정작 자기 자식은 돌보지 못했다. 어려움 속에도 잘 자라준 아들은 백인 고용주의 냉혹한 무관심 탓에 비명횡사했다. 어느 날 자유주의자인 작가 지망생 스키터가 그를 붙잡고 묻는다. “하녀로 사는 건 어떤 기분이죠?” 스키터는 에이블린과 그 친구들을 설득해 굳게 닫힌 입을 열고, 봇물 터지듯 쏟아진 얘기들을 엮어 책으로 낸다. 소설은 그 책이 1960년대 허위로 찬 미시시피주 백인 사회를 메스처럼 헤집는 결말까지를 차분히 따라간다.

 소설 속 에이블린은 말한다. “내 삶이 어떤지 그 전엔 아무도 물어주지 않았다.” 백인 주인들은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늘 거기 있고 꼭 필요하지만 애써 의식할 필요 없는. 마침내 스키터가 당신 삶은 어떠냐고 물었을 때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쌓아 올린 가슴속 둑이 터졌다. 그러니까 우리 엄마도 스키터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평생 안으로 삼킨 말들이 창자를 채우고 위장을 채우고, 목구멍까지 차고 넘쳐 요령부득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 어쩌면 내게 새로 생긴 버릇은 죽은 엄마의 선물이 아닐까. 쌓아 두지 말으렴, 마음을 나누렴. 뭣보다 네 스스로 먼저 잘 묻는 사람이 되렴. 넌 제대로 물어야 할 사람, 기자가 아니겠니.

 그러고 보면 요즘 거센 안철수 바람, 김여진 바람의 기저에도 이들이 건넨 어떤 특별한 ‘물음’들이 있지 않나 싶다. 안철수는 청춘콘서트를 통해 청년들에게 물었다. “꿈 꾸기조차 벅찬가요? 뭘 바꾸면 좋을까요?” 김여진은 올 초 농성 중이던 홍익대 청소부 아주머니들을 찾아 물었다. “힘드시지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묻지도 않고 답부터 쏟아내는 기성의 주류에 질린 이들에게 둘의 자세는 그 자체로 신선했을 터. 그러니 잘 물어야 할 사람은 기자만이 아닌 듯하다.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는 삶을 이고 진 사람들에게, 당신이 정치인이라면 이제 무릎 걸음으로 다가갈 때다.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