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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추억의 그라운드 - 김재박.中(한국야구 세계정복의 핵심 外)

중앙일보

입력

3. 한국야구 세계정복의 핵심.

한국야구가 세계무대에서 첫 우승을 한 것은 앞서 소개한 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 퍼월드컵(현 대륙간컵)대회였다. 당시 미국을 꺾고 감격의 정상에 오른 후 12월의 쌀쌀한 날씨에 개선한 대표단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까지 카퍼레이드까지 벌였으니 감개무량한 일이다. 김응룡 감독이 이끈 대표팀에서 김재박은 타격상 도루상 최다안타상 등 3관왕을 수상하고 돌아와 절정의 야구감각을 과시했다.

1982년 잠실야구장에선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뭐니뭐니해도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김재박이 보여준 ‘개구리점프번트안타’는 압권이었고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당시를 잠시 회고해보면 쿠바의 불참으로 한국과 일본이 결승에서 만났고 일본 선발 스즈키의 코너를 찌르는 변화구에 농락당하며 7회까지 1안타의 빈타로 0-2로 끌려가는 형국이었다.

운명의 8회. 심재원의 안타를 시작으로 김정수의 2루타로 1점을 만회한 한국은 1사 3루에서 김재박이 등장, 볼카운트 1-1에서 바깥쪽 높은 공을 환상의 기습번트로 연결시키며 2-2동점을 만들고 1루에 살아나가 역전의 발판을 만들었고, 결국 한대화의 3점포로 5-2로 일본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추후 이 상황은 ‘사인미스 ’라는 어우홍 감독의 후문을 남겼지만 정작 김재박 본인은 기습번트를 노렸다고 상반된 주장을 해 또 한번 화제가 된 바 있다.

4. 프로선수 생활

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김재박에 있어 또 한번 찾아온 기회의 무대였다. 그는 어찌 보면 행운의 사나이다. 대광고와 영남대는 물론이고 한국화장품에 이르기 까지 창단멤버로 뛴 경력의 소유자. 기회는 그를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프로야구 역시 그를 외면하지 않았고 원년(82년) 막바지에 이르러 MBC청룡에 입단하며 화려한 시대로 접어든다.

85년 도루왕을 비롯,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5회나 수상(83~86, 89)하며 팬들의 사랑을 담뿍 받은 김재박은 90년 LG의 창단멤버로 팀의 맏형노릇을 톡톡히 해가며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맛본다.

서울 팀 최초의 우승은 95년까지 이어진 프로야구 르네상스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김재박의 선수시절 2가지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먼저 공 2개만 던지고 승리투수가 된 사연.

1985년 7월 27일 삼성과의 잠실경기 연장 10회초 1사 만루에서 유격수이던 그를 김동엽 감독(작고)이 투수 마운드에 올렸다. 뜻밖의 등판에 이해창에게 빨랫줄 타구를 허용했으나 3루수 직선타가 되면서 3루주자 함학수가 횡사, 더블아웃을 시키며 불을 끌 수 있었고 , 10회말 1사 만루에서는 끝내기 중전안타를 쳐내 최소투구 승리투수(공2개)와 함께 결승타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1986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선 당시 ‘어우동’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영화배우 이보희양이 수상자 김재박(金在博)을 김재전(金在傳)으로 잘못 불러 망신살이 뻗쳤다. 이후 87시즌 김재박이 타석에 들어설 때 한동안 관중들이 ‘김재전 파이팅’을 외쳐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92년 태평양으로 이적 후 은퇴를 앞당긴 건 다른 이유보단 전력이 약한 태평양의 지는 야구가 싫었던 때문이었다고 김재박은 회고한다. 지는 야구의 반복 속에 선수로서 야구를 할 매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93년부터 코치가 된 김재박은 3년간의 짧은 코치 생활 끝에 신생팀 현대 유니콘스의 초대 감독으로 발탁되며 또 다른 야구인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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