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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메이저리그 역사 (6) - 블랙삭스 스캔들

중앙일보

입력

메이저리그 역사가 100년을 지나오는 동안 세번의 고비는 1919년, 1942년, 1994년에 찾아왔다.

1942년의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메이저리거 5백명과 마이너리거 3천5백명이 참전했고, 이로 인한 심각한 선수부족은 경기의 질적저하로 나타났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였다. 선수부족 문제는 훗날 '인종차별의 벽'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됐고, 구단들의 눈을 중남미로 돌리게 했다.

42년에 비하면 19년과 94년의 위기는 메이저리그의 존폐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큰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더 심각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42년의 위기가 팬들에게 메이저리그에 대한 애착심을 불러온 반면, 후자의 상황은 메이저리그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19년과 94년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두 영웅이 나타나 위기를 극복했다는 것. 바로 베이브 루스와 마크 맥과이어에 의해서였다. (1994년의 파업은 다음 편에서 기술하기로 한다.)

1910년대 후반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메이저리그 최강팀이었다. 특히 1917년에는 시즌 100승을 거뒀고(당시는 154게임), 내셔널리그 챔피언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1919년 다시 아메리칸리그 정상에 오른 화이트삭스는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와 만난다.

당시 화이트삭스는 '맨발의 조' 조 잭슨을 비롯해 에디 콜린스, 찰스 리즈버그, 벅 위버, 치크 갠딜 등의 강타선에 에이스 에디 시카티와 떠오르는 레프티 윌리암스가 이끄는 짜임새 있는 투수진을 갖고 있었다.

월드시리즈의 상대 신시내티는 비록 내셔너리그의 챔피언이긴 했지만 1910년대 만년 하위팀의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었고, 따라서 화이트삭스의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화이트삭스 선수 8명은 도박사들과 작당하여 승부조작의 음모를 꾸민다. 우승분위기로 몰아간 다음 일부러 져 줘 판돈 중 일부를 받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협잡꾼에 건달들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블랙삭스 스캔들'의 주범은 당시 구단주였던 찰스 코미스키였다.

찰스 코미스키는 맨주먹부터 시작해 구단주의 위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시내티 레즈 감독시절 기자 벤 존슨과 함께 아메리칸리그를 창설했고, 선수출신으로는 최초로 구단주의 위치에 올랐다.

또 코미스키는 현역 시절, 최초로 베이스를 벗어난 1루수였다. 1루수가 타구를 처리하고 투수가 베이스에 들어가는 형태의 수비를 최초로 개발한 것만 봐도 그가 메이저리그의 개척자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러나 구단주로서의 코미스키는 '악명높은 구두쇠'였다. 선수들의 경기복조차 빨아주지 않아 화이트삭스의 별명이 블랙삭스가 될 정도였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코미스키의 가장 악랄했던 능력은 선수들과의 연봉책정 과정에서 발휘됐다.

1919년 다른 구단보다 상대적으로 연봉을 적게 받고 있던 화이트삭스 선수들은 구단주가 다시 연봉을 올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강경하게 나갔고, 이에 코미스키는 선수들에게 '옵션연봉'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연봉 6천달러의 에디 시카티에게 30승을 올리면 1만달러의 보너스를 줄 것을 약속한 것.

1919시즌 시카티의 승수가 29승이 되자 코미스키 구단주는 감독에게 시카티를 더 이상 출전하지 못하게 할 것을 지시한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었다. 당시로서는 구단주의 처사에 아무런 이의제기도 할 수 없었던 선수들은 폭발했다. 그리고 헤비급 챔피언 출신의 1루수 치크 갠딜의 주도하에 월드시리즈를 져주고 여덟명의 몫으로 8만달러를 받는 음모를 꾸민다.

월드시리즈에 임한 8명의 선수들은 일부러 실책하는 등 지기 위한 경기를 했고 결국 월드시리즈는 5승 3패 신시내티의 승리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이듬해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

치크 갠딜을 비롯, 에디 시카티, 스위디 리즈버그, 프레드 맥멀린, 레프티 윌리엄스, 조 잭슨, 조지 위버, 오스카 펠시의 가담자 8명이 법정에 기소됐다. 하지만 1921년 그들이 받은 최종 판결은 놀랍게도 무죄였다. 확실한 승부조작의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921년 신설된 커미셔너에 취임한 케네소 랜디스 판사는 그들을 야구계에서 영구추방하는 단죄를 내렸다.

블랙삭스 스캔들이 밝혀진 후 메이저리그를 보는 팬들의 눈은 달라졌다. 어쩌면 메이저리그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도 있었던 순간 베이브 루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루스의 홈런쇼에 의해 블랙삭스 스캔들은 팬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그러나 블랙삭스 스캔들로 인해 탄생한 '커미셔너 제도'의 영향은 컸다. 공인된 독재자나 다름없었던 커미셔너는 흑인선수들의 메이저 진출을 막는 등 이후 50년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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