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영화의 '금기사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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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에는 몇가지 건드리지 못하는 '금기의 소재'가 있다.

주로 종교계의 문제나 여러 종류 권력집단의 치부를 슬쩍 스치듯 다루기만 한 영화도 제작과정 가운데 또는 상영을 눈 앞에 두고 피켓과 슬로건을 앞세운 시위대의 실력 행사에 밀려 개봉조차 못하고 필름을 접어야 하는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헐리우드의 각종 영화도 다양한 이익집단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는 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다양한 민족과 인종, 종교가 혼재하는 미국 사회에서 이같은 일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물론, 개봉을 아예 원천봉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사회와 다르지만.

최근 헐리우드에서 여름 관객을 겨냥해 개봉한 영화도 특정집단을 지나치게 폄하하거나 왜곡했다는 이유로 거센 항의에 부닥치고 있다.

우선, 클레이 에니메이션으로 제작한 풍자 코메디 'Chicken Run'이 '가금권익 보호연맹(Poultry Rights League)'의 피케팅등 항의 시위에 시달리고 있다.

이 연맹은 영화 'Chicken Run'이 닭이나 칠면조등 가금들을 무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Chicken Run'에 대한 항의는 영화처럼 코믹하지만 다른 예들은 만만치 않게 심각하다.

멜 깁슨이 주연을 맡은 영화 'Patriot'는 영국인들을 비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컬럼비아사가 미국의 독립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제작한 이 영화는 실제 인물인 영국군 대령 밴스터 탈턴을 모델로 한 윌리암 태빙턴 대령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어린이를 사살하는 잔인한 악당으로 묘사했다.

이영화는 즉각 영국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런던의 익스프레스지는 이를 두고 "헐리우드가 영국인들을 비겁하고 잔인하며 가학적인 인물로 그린 민족혐오적인 편견"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또 영국영화위원회의 이안 톰슨은 "냉전 시대의 종식 이후 별다른 적을 찾지 못한 미국이 새로운 적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와 함께 코미디언 짐 캐리가 다시금 주연을 맡은 영화 'Me, Myself, & Irene'은 정신질환자 권익보호단체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이중인격의 경찰로 출연하는 짐 캐리가 보여주는 행동이 정신질환자들을 비하하고 심각한 치료를 필요로 하는 질병을 희화화한 것이 전국정신건강협회의 분노를 샀다.

특히, 영화의 제작사인 20세기 폭스가 영화 홍보물로 제작한 하얀 젤리 콩이 정신과 치료에 사용되는 알약을 나타낸다는 점이 커다란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 협회의 마이클 팬자 회장은 "짐 캐리는 훌륭한 엔터테이너다. 그러나 그도 정신질환이 발생할 경우 영화에서 일으킨 충격을 그대로 받을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한편, 다이 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와 온갖 고생을 같이 한 흑인 배우 새뮤얼 잭슨이 주연을 맡은 영화 'Shaft'는 미국내 히스패닉계(라틴계)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라틴계의 이름을 갖고 있는 주요 배역 두 사람인 형사 카르멘 바스케스와 마약조직 두목 피플스 헤르난데스가 모두 흑인인 바네사 윌리암스와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한다는 점이 히스패닉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히스패닉계 잡지인 'Latina'의 실비아 마르티네스 편집장은 "라틴계가 아닌 흑인등 다른 인종이 라틴계의 배역을 맡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이같은 캐스팅은 민권운동 이전인 60년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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