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작은 ‘식모방’을 위한 헌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7면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

내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한 지인들은 대부분 조금 놀라게 된다. 이유는 방 배치 때문이다. 안방의 존재감이란 아예 없다. 가장 붐비는 곳은 공부방, 좀 근사하게 말하면 서재가 되겠다. 커다란 회의용 탁자가 가운데 놓여 있는 서재에는 아침·저녁 시간 온 가족이 붐빈다. FM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가정의 모든 화제가 공유되는 공간이다. 달랑 한 대의 컴퓨터가 온 가족 공용으로 있다 보니 아이들도 어쩔 수 없이 과제물을 들고 서재로 몰려 든다. 탁자 주변에는 의자가 식구 수대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구석에는 내가 낮잠을 즐기는 작은 소파가 있다. 하버머스가 얘기하는 이른바 공론의 공간(public sphere)인 셈이다.

 내가 (세 들어) 사는 아파트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다. 단지 전체가 5층인 데다 현관문 크기가 작아 40년 전 한국인들 체구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 정작 놀라운 것은 부엌 안쪽에 잘 숨겨져 있은 작디작은 방이다. 두 사람이 누우면 딱 붙어 서로 체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구석방이다. 이불을 개어서 올려놓는 선반이 있고, 선반 아래 옷을 걸 수 있는 대나무 횟대가 있다. 이쯤 되면 이 땅의 중년 세대는 눈치채리라. 콧구멍 크기만 한 이 작은 방은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식모방’, 1970년대 초 건축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 숨겨져 있는 이 작은 방은 안방 격으로 우리 부부가 사용하는 공간이다.

 40년이 지났지만 작은 방은 그 시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바닥을 꽉 채운 얇은 매트리스 한 장, 아내가 학창 시절부터 봐왔던 20년이 조금 더 된 초소형 텔레비전, 그리고 작은 화장대가 전부다. 나는 기막히게 숨겨져 있는 이 작은 방을 사용하면서 가끔씩 묘한 감회에 젖게 된다. 이른바 ‘식모’로 이름 붙여진 꽃다운 처녀들이 이 구석방에서 주인집 식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얼마나 숨죽여 살았을까 하는 상상에 맘이 짠해진다.

 방 배치에 관한 한 나만의 고집을 가지고 있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미련 없이 가장 큰 방을 갓 태어난 아기에게로 넘겼다. 그날 이후 가장 큰 방은 딸아이 방으로, 다음 크기의 방은 아들 방으로 굳어졌다. 아내와 내가 사용하는 방은 언제나 부엌 귀퉁이 작은 방, 혹시라도 여유 방이 있을 경우는 서가나 창고로 사용해 왔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짧은 인생 동안 많은 방을 거치며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듯 방도 정이 드는 경우가 있다. 지금의 부엌 옆 ‘식모방’은 나에게 그런 방이다. 구석방에 드러누우면 조용히 나만의 삶의 궤적을 복기할 수 있다. 그래서 가끔은 꽃다운 시절로 돌아가 입가에 웃음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고 난 뒤가 그만큼 더 처참하고 황폐하기 때문이고, 꽃다운 시절이 아름답다는 것은 꽃다운 시절이 다 가버렸다는 의미가 아닌가 .

 올해도 다 갔다. 마음은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는 봄날’에 머물고 싶은데 시간은 어김없이 한 해 끝자락에 우리를 야멸차게 세워두고 있다. 한때 북미 평원을 주름잡았던 아라파호 인디언은 11월을 두고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이 문밖에 기다리는 11월은 헛헛하다. “개문다낙엽(開門多落葉), 잠 깨어 내다 보니 문밖에 낙엽이 수북하다.”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한 당대 시인 무가상인(無可上人)의 한 구절이다. 그렇다. 삶이란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얼마 남지 않게 되면 점점 빨리 돌아가게 간다.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매체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