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춘추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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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춘추(春秋)』는 공자가 지은 역사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공자 세가’에는 공자가 춘추를 지은 계기가 전한다. 공자가 “안 된다! 안 된다!”라고 탄식하면서 “군자는 죽은 후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데, 나의 도가 시행되지 않았으니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스스로 드러나 보이겠는가”라면서 『춘추』를 지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현실을 바꾸는 정치가가 되고 싶었지만 어느 군주도 그의 도(道)에 관심이 없었기에 대신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마천이 “오나라와 초나라의 군주들이 왕을 자칭했지만 『춘추』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자작(子爵)으로 칭했다”고 적고 있듯이 공자의 붓끝은 매서웠다. 맹자(孟子)는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니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하였다(孔子成春秋,而亂臣賊子懼)(‘등문공(藤文公)’)”고 평했고, 사마천도 “『춘추』의 의리가 행해지자 천하의 난신적자들이 두려워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공자의 사서(史書) 집필 방식이 춘추필법(春秋筆法)으로서 이후 사서 서술의 전범이 되었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신하인 수양대군이 임금인 단종을 시해(弑害)했음을 춘추필법으로 기록한 것이다.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던 제자 김일손(金馹孫)은 체포될 때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역사 기록(史事) 때문이라면 반드시 큰 옥사가 일어날 것이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2일)”고 예견했고, 실제로 그와 권오복·권경유·이목·허반 등이 목이 잘려 죽는 무오사화(연산군 4년:1498)가 발생했다. 『세조실록』은 ‘노산군(魯山君)이 스스로 목매어 졸(卒)하니 예(禮)로써 장사지냈다(『세조실록』 3년 10월 21일)’며 단종이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대 인물인 이자(李<8014>:1480~1533년)는 『음애일기(陰崖日記)』에서 “실록에 노산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했다고 한 것은 모두 당시 호서배(狐鼠輩:여우·쥐의 무리)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고 성토했다. 단종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수양이 시해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처럼 사실대로 직필(直筆)하면 된다. 독재자는 독재를 했다고 쓰면 되고,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다면 또 그렇게 직필하면 된다. 팩트는 사실대로 서술하되 해석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21세기 개명(開明)천지에 팩트까지 바꾸려는 호서배들의 붓장난이 다시 재연되는 것은 아닌지 주시하고 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