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연의 매력 발전소] 곰 같기도 여우 같기도 한 뤼크 베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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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연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부산 바닷가 호텔의 햇살 드는 방. 멋진 데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의 남성, 한 명의 여성과 함께. 초겨울 쌉싸름한 바람 도는 바닷가도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꽃 중의 꽃은 사람 꽃이라고 역시 멋진 사람과의 만남은 인간의 오감을 가장 기쁘게 자극하는 일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사랑 받고 있는 뤼크 베송 감독과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홍콩 영화 배우에서 출발, 할리우드까지 접수한 양자경. 이 두 사람을 나란히 앞에 두고 앉자 나는 이 멋진 사람들이 풀어낼 이야기 보따리에 이미 흥분하고 있었다. 이런 멋진 데이트라니!

 ‘여우는 데리고 살아도 곰은 데리고 살지 못한다’는 말은 주로 시어머니나 남편이라는 주체에 의해 많이 쓰여온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주체로서의 며느리, 아내, 혹은 여성들도 이성을 바라보거나 평가할 때 쓸 수 있는 법. 다만 쓰는 사람마다의 속뜻이나 경험상 갖고 있는 숨은 뜻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이왕이면 둘 다~’라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곰과 여우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사람이 많다면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그런데 뤼크 베송 감독을 인터뷰하는 내내 나의 머릿속엔 자꾸 이 곰과 여우가 오락가락하는 것이었다.

 

뤼크 베송

인터뷰를 하기 위해 첫인사를 나눌 때 양자경의 화사한 미소와 달리 뤼크 베송의 표정은 텁텁함 그 자체였다. 인터뷰어인 내게 인터뷰이로 만나는 영화감독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코믹 영화같이 끝없이 유쾌하게 풀어내는 사람과 그로테스크한 영화처럼 동굴 속으로 동굴 속으로 식의 이야기를 하는 타입. 뤼크 베송의 첫 인상은 후자 쪽이었다. ‘에휴~’ 하는 소리가 스며 나왔다. 그러나 웬걸.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그는 의자에 기대고 있던 등을 들썩거리며 인터뷰의 바다에 풍덩! 다이빙을 하는 것이었다. (파리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그의 꿈은 다이버였다.) 텁텁하던 그의 첫인상이 갑자기 바뀌더니 내 앞에서는 마치 귀여운 테디베어가 두 손을 열심히 움직이며 이야기하는 듯한 환영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티셔츠에 헐렁한 재킷을 겹쳐 입은 그는 외모만 보아서는 세상물정 모르는, 귀여운 소년 같았다(뤼크 베송이 한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내털리 포트먼이 오스카상을 받을 때 당신의 이름을 거명하더라는 말로 추임새를 넣자 그는 첫인상이 감추고 있던 장난기 많은 소년을 냉큼 꺼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때 프랑스에 있었고 시차 때문에 시상식을 보지 못했죠.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미국에서 문자메시지 27개가 와 있는 거예요. ‘누가 죽었어?’ 했죠. 하하하” 그의 화려한 몸짓 섞인 농담에 양자경과 나는 의자 아래로 떨어질 듯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아시잖아요. 내털리 포트먼이 11살일 때 제가 영화 레옹에 출연시켰죠. 제가 오스카상 수상자를 직접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는 만든 것이죠. 그녀가 그 옛날 일을 그렇게 가슴에 품고 있을 줄 몰랐죠.”

 유쾌한 그. 그러나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시작부터 뜨거웠다. 부상으로 다이버가 될 수 없게 되자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백지 한 장을 들고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사진 찍기와 글쓰기라는 항목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영화라고 결론 내린다.

 “내 평생에 할 일을 그냥 머릿속에서 결정할 수 없었죠. 친구에게 부탁해서 영화 현장에 찾아갔어요. 그런데 영화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말 그대로 fall in love 한 것이죠” 어쩌다 영화감독이 됐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설명은 간단했고 간단한 만큼 명쾌한 것이었다. 사랑에 빠졌다!

 그는 새 영화 ‘The Lady’를 만든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웅산 수치의 인생을 그린다는 건 책임감을 갖고 해야 할 일이었어요. 그녀의 인생에 누가 되는 일은 조금도 하면 안 된다는 것에 극도로 신경을 썼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실’에 집착하는 것이었죠. 그녀의 내면은 다 모르더라도 외적인 것이라도 사실에 가장 가깝게 담아내려 했어요. 그녀의 집을 구글 어스로 찾아내서 크기까지 똑같이 만들고 그녀가 키운다는 개의 사진을 구해 똑같은 종을 구해오도록 했죠. 구했어요.” 그가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동안 그 영화의 주연으로 연기했던 양자경은 그의 섬세하고 섬세함, 때론 완벽에 대한 집착을 증명해주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영화는 감독을 담는다. 뤼크 베송이 만든 ‘레옹’ ‘그랑블루’ ‘제5원소’ ‘테이큰’ 등의 영화는 다양한 세계의 다양한 빛깔을 담고 있다. 곰과 여우를 한 몸에 담고 있는 그처럼.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예술적’이지 못하다고 배척받았으면서도 전 세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백지연 커뮤니케이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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