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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번째 편지〈7번 국도 불꽃놀이〉

중앙일보

입력

봄에 그토록 가고자 했던 길을 장마를 앞둔 여름에 당신과 함께 떠납니다. 밤 8시. 나를 깨운 것은 오후에 태국에서 돌아온 당신의 전화였습니다. 초저녁부터 잠을 잤던가. 아니면 마음을 잃고 무연히 빈 의자처럼 앉아 있었던가. 전화벨 소리는 아주 먼 데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는데 그때 베란다의 장미가 피고 있었던가 지고 있었던가.

내가 전화를 받자 꽃봉오리는 열리기 혹은 닫기를 멈추고 새침하게 뒤로 돌아 앉습니다. 저 혼자 밤에 옷을 벗고 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웬 남자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사춘기의 여학생처럼.

오랜만의 연락에 무척 반갑고 놀랐습니다. 일본에 다녀오고 나서 이런저런 일로 경황없이 며칠을 보냈던 것입니다. 응답기의 전화 녹음은 난로 속의 타고 남은 석탄처럼 쌓여가는데 뚜껑을 열 엄두가 좀처럼 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번 들까말까한 수화기를 집어드는 순간 대뜸 당신이란 걸 알았습니다.

아, 먼 데서 돌아오셨군요.

당신은 느닷없이 내게 밤 여행을 떠나자고 했습니다. 하동 섬진강 거쳐 부산 해운대 거쳐 경주에서부터 시작되는 7번 국도를 타고 신라의 푸른 길을 달려 속초의 숭어를 보고 대관령이나 한계령을 넘어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오늘 밤. 당신은 이미 여행 준비를 끝내놓고 내게 전화를 건 참이었습니다.

9시에 홍대 앞 〈소더비〉란 술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카메라백만 챙겨들고 문을 닫고 집을 나섭니다. 밤 여행. 늘 혼자 밤길을 가며 앞에서 달려오는 캄캄한 도로를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했던 청춘이 날들이 떠오릅니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일까. 또 지금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와 있기나 한 것일까.

밤은 길을 풀어 상처난 사람들을 부르고 잠 못드는 짐승들을 부릅니다. 길가 피다 만 꽃 속에 가랑비가 듣습니다.〈소더비〉에서 이글스의〈Hotel Califonia〉와 스틱스의〈Boat On The River〉를 들으며 쓰디쓴 커피를 마시고 곧 길을 떠납니다. 밤에 길 떠나기에 좋은 음악입니다.

섬진강까지는 아주 멉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로 길을 바꾼 다음 전주에서 남원을 거쳐 구례를 지나야만 합니다. 대략 일곱 시간은 걸립니다. 도착하면 새벽 4시. 구례 산동의 산수유도 쌍계사와 섬진강의 벚꽃도 다 져버린 6월인데 왜 이렇게 밤길을 떠나고 있는 것일까. 이번에는 아마 당신과 함께이기에 기꺼이 가고 있는 것일 터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4번과 9번을 푸르트벵글러 연주로 듣습니다. 4번을 듣고 있으면 베토벤이 얼마나 깊고 장중한 사색을 했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토록 심오하고 느리게 파고드는 그 우주적 깊이에 곧 매료됩니다. 특히 2악장이 그렇습니다. 그는 가장 놓은 음과 가장 낮은 음에 매달린 사내입니다. 깊이를 말하는 거겠지요.

"태국 맥주를 먹으면 점점 눈이 멉니다. 물에 석회가 많이 섞여 있어 그렇다고 합니다."

당신은 열대 얘기를 하다 어느덧 잠들어 있고 나는〈합창〉을 들으며 길을 달립니다. 나는 혼자서 이런 말을 중얼거립니다.

"철쭉술을 먹으면 점점 눈이 멉니다. 지리산 어디에 세상을 등지고 들어가 나머지 생을 철쭉술만 마시다 눈이 멀어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귀가 멀고 밤에 자주 길을 떠나는 사람은 눈이 멉니다. 더구나 옆에 여인이 잠들어 있으면 사내들은 필시 눈이 멀고 귀가 멀게 됩니다. 생은 그런 것입니다. 눈귀가 멀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게 한편 삶이라는 걸 어느 날 섬광처럼 깨닫게 됩니다. 혼자일지언정 때로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동까지 차마 못가고 구례 산동에서 숙소를 잡아 곧 잠이 듭니다. 새벽 4시. 산수유 이제 없음. 섬진강 어두워서 보이지 않음. 은어떼 물속 거슬러오르는 소리만 이명처럼 귀를 간지럽힘. 당신의 흰 목덜미를 강물처럼 엿보다 은어 꿈을 꾸며 잠이 듬.

아침. 차를 몰아 섬진강을 끼고 하동으로 갑니다. 가뭄이어서 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꽃 냄새로 온 섬진강이 정욕처럼 분분합니다. 남해로 가는 길가엔 배꽃 다 지고 재첩국 속에서도 그 정욕 같은 밤꽃 냄새가 물씬거립니다.

상주 남해금산을 지나 부산으로 갑니다. 저녁에 해운대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포장마차에서 오도리에 맥주를 마시고 당신과 밤새 불꽃놀이를 합니다. 하나-비. 곧 화-화(花-火). 불꽃들은 보름달의 검푸른 바다로 소리없이 지며 낱낱이 죽습니다. 모든 존재의 끝은 아마 저런 모양일 겁니다. 저렇듯 검푸른 우주에 샅샅이 지고마는 것.

그렇다면 에잇, 사랑이라도 해야겠다.

당신을 옆에 두고 잠이 듭니다. 낮에 본 밤꽃들 모두 몰려와 밤새 키득거리며 떠나지 않습니다. 화화. 새벽이 돼서야 꽃들은 마침내 바다로 소리없이 집니다.

이튿날 당신의 친구 결혼식에 참석합니다. 당신의 여고 적 친구들이 식장에 채송화처럼 총총이 몰려와 있습니다. 저 어여쁜 것들도 언젠간 소리없이 죽겠지. 그리고 다시 미련을 갖고 태어나 조금은 휘황하고 또 조금은 낯선 삶을 힘겹게 살아가겠지.

혼례도 한편 그러한 것. 신혼의 첫날밤이 지나면 그 어떤 것들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깨끗이 죽고 순결을 잃은 육체만 형형하게 남게 되는 것. 아름다움은 처음부터 단 한번뿐이었던 것.

결혼식장을 떠나 경주로 갑니다. 경주는 천 년 왕의 거처답게 궁륭이 첩첩하고 동천 남천이 뿜어올린 물안개로 사방이 아득합니다. 분황사 옆을 지나 내처 포항을 지나 영덕을 지나 7번 국도를 은어처럼 거슬러올라갑니다. 한참을 달려 이윽고 은어떼가 모이는 울진의 왕피천에 닿습니다.

왕피천을 옆에 두고 온천에서 또 하루를 묵습니다. 그날 밤 당신은 아주 먼 데서 돌아온 은어였고 나는 한갓 체념한 화랑이 되어 불영사 계곡을 떠돌아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나를 체념하자 누군가 지느러미를 끌고 올라와 내 머리칼을 열심히 건드립니다.

아, 나를 깨운 것은 그대였다. 오랜 회유로 나는 지쳐 있었고 왕피천을 지나 더 멀리 오다 보니 뜨거운 물이 나타나 그게 곧 죽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더운 물 속으로 도대체 얼마나 먼 지 알지 못할 전생에서 돌아온 너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번 7번 국도는 그렇게 울진에서 끝이 납니다. 울진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은 봄에 화적처럼 덮쳐온 산불로 온 산들이 시커멓게 죽어 있습니다. 달아나듯 강릉까지 거슬러올라갑니다. 정동진에서 바닷물에 잠깐 발을 담그고 속초로 가려다 내처 대관령을 넘습니다. 옆에서 당신이 묻습니다.

"속초 숭어는요?"

나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어젯밤 은어가 숭어로 변하고 숭어가 또 은어로 변해 밤새 왔다갔다 하는 꿈을 꾸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생각하면 결국 하나입니다. 너를 은어로 생각하면 은어가 되고 숭어로 생각하면 또 숭어가 됩니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게 은어이고 숭어였던 것. 반딧불들은 불꽃놀이였던 것. 봄 벚꽃은 여름 밤꽃이었던 것. 온천은 꿈에 열대였던 것.

그리하여 물고기들은 그렇게 밤꽃 냄새에 휩싸여 간밤에 그리 더운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그날 결혼식에 몰려왔던 채송화들도 모두 그러할 것.

...그리고 다시 화화. 보름달이 뜬 검푸른 밤바다에 떨어지는 불꽃들. 어느 날 생은 길 끝에 이르러 그렇게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 생이라는 이름의 단 하나뿐인 아름다움을 무상히 지우며 흩날리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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