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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선봉 대한매일신보, 일제 농간에 친일 매체 둔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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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호 26면

베델의 묘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있다. 베델은 일제의 침략 행위에 진정으로 분개한 영국 언론인이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식민통치 구조
⑧ 언론에 물린 재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일제는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직후 언론 통제에 들어갔다. 통감부 경시통감 와카바야시(若林賚藏)는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한국인이 내국(內國:한국)에서 발행하는 신문지는 경시청 또는 도 경찰부에서 인쇄 전에 원고를 검열해 과격한 문자를 삭제하고 게재시키기 때문에 기사는 대개 평온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러나 검열하기 어려운 신문들이 있었다. 와카바야시는 “경성에서 영국인 만함(萬咸·Marnham, 베델의 후임 사장)이 경영하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나 재외 한국인이 경영하는 샌프란시스코(桑港)의 ‘신한민보(新韓民報)’, 하와이(布<54C7>)의 ‘신한국보(新韓國報)’,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浦<5869>)의 ‘대동공보(大東共報)’는 매 호 거의 배일적인 언론을 싣지 않은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양기탁(梁起鐸)이 영국인 베델(Bethell, 한국명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운영하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단속하기가 어려웠다. 통감부 ‘경찰의 기밀보고문서(警秘)’에 따르면 대한매일신보의 발행부수는 국한문 7500부, 언문(한글) 4500부, 영문 500부로 합계 1만2500부였다. 당시로는 대단히 많은 부수였고, 구독자 대부분이 여론 주도층이었다.

1 대한매일신보. 일제는 조선 강점 후 가장 반일적이었던 대한매일신보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로 전락시켰다. 2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던 양기탁(1871~1938). 양기탁은 망국 후 임시정부 주석 등을 역임하다가 중국에서 사망했다. 3 양기탁 묘소. 1993년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그래서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908년 5월 1일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電文)에서 ‘외국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그대로 두면 치안 유지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며 신문지법을 개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 제34조로서 “외국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 또는 외국인이 내국에서 발행하는 한국어 신문으로 치안을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壞亂)한다고 판단할 때는 내부대신은 발매 및 반포를 금하고 그 신문을 압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35조와 36조는 그 벌칙이었다.

영국 브리스틀 출신의 베델은 1904년 러일전쟁 때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왔다가 그해 7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이토는 1908년 5월 2일 하야시 외무대신에게 “(대한매일신보가) 한국인을 교사(敎唆)하여 무기를 잡고 일어나 국적(國敵)을 물리치라면서 암살을 종용하고 인심을 선동하는 등 한시도 방치해 두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며 “근본적으로 해독을 제거하려면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고 신문 간행을 정지하지 않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고민을 토로했다. 이토는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더라도 “경성 주재 영국총영사가 베델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를 해 주지 않기를 바란다”고 요구하고 있다. 영일동맹 당사국이었던 영국의 주상하이 총영사 코크번(Cockburn)은 일본에 협조적이었지만 무작정 자국민 추방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통감부는 법적 근거를 만들기 위해 1908년 5월 27일 영국 상하이고등법원 검사 윌킨슨(Wilkinson H P)과 함께 베델을 제소했다. 6월 15일부터 사흘간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공판에서 재판장 보온(Bourne)은 베델에게 경범죄 위반으로 3주일 금고를 선고했다. 베델은 상하이로 압송돼 수감됐는데, 이때 통감부는 베델의 처벌에 대한 전국 각지의 대한매일신보 독자들의 반응까지 세세히 조사하기도 했다.

조선통감부 자료에 따르면 1909년에만 모두 137건, 2만947부의 신문을 압수했다. 대한매일신보와 해외에서 발행되던 신문들이 압수 대상이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던 대동공보는 거의 매 호 압수됐다. 압수된 내용은 “일본의 보호를 한국병탄이라고 무고한다”는 것과 “암살자를 의사(義士)라 일컫고 이런 사상의 고취에 힘쓰는 것” “폭도를 국가에 충성된 자라고 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이완용을 처단하려 한 이재명,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 등을 의사라고 지칭하고 의병을 국가에 충성된 자라고 보도했다는 것이다.

또한 대동공보와 신한민보는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을 한국인 국권 회복 단체의 근거지로 할 것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압수했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론을 실어도 압수 대상이었다. 이토는 러시아·청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함북·평북을 통해 “신문이 몰래 수입될 염려가 없지 않다”며 관계 경찰부에 엄중한 주의를 명령했다. 또 “우편으로 보내오는 신문도 경무국의 검열을 받은 뒤 배달하라”고 덧붙였다.

일본이 호시탐탐 추방을 노리던 베델에게 더 큰 문제는 심장병이었다. ‘헌병 기밀문서(憲機) 907호’(1909년 5월 2일)는 “(베델은) 대한매일신문사 사장으로, 악덕 기자로 유명했는데 지난 1일 오전 11시30분 결국 병사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의 나이 불과 만 37세였다. ‘헌병 기밀문서’는 “베델의 장례식 뒤 외국인 묘지(현 양화진)에 매장했는데, 외국인과 한국인 300여 명이 모여 성대하게 치렀다”는 사실도 보고했다. 베델의 사망은 대한매일신보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외피가 벗겨진 것이었다. 일제는 그전에도 양기탁을 국채 보상금 횡령(國債報償金橫領)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했으나 베델이 허위 조작이란 증거를 제시해 풀려난 일도 있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1910년 6월) 매일신문 사장인 만함(萬咸)이 임무를 중단하고 귀국했다”며 “이에 사원 이장훈(李章薰) 등이 그 활판을 4만원에 매입한 후 사옥을 포전(布廛)으로 옮겨 문을 열고, 이장훈이 주필을 맡아 이달 14일부터 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장훈 명의로 발행되자 양기탁은 자신은 손을 뗐다는 사실을 각 신문에 광고로 알렸다. 매천야록이 “그 논설은 옛날에 비해 조금 온건하였다”고 전하는 대로 이미 신문의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나마 한국인 손으로 발행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이종수(李鍾洙)는 주요한이 발행하던 동광(東光) 28호(1931년 12월호)에 게재한 ‘조선신문사, 사상 발달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대한매일신보는) 이장훈씨가 맡아하다가 합병(合倂)될 때 총독부에 매수되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가 되어 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총독부가 가장 반일적인 대한매일신보에서 ‘大韓(대한)’ 두 자를 빼고 난 다음 총독부 기관지로 전락시킨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 강점 후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매일신보 이외의 모든 한국어 신문을 폐간시켰다. 차상찬(車相瓚)은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개벽 1935년 3월호에 조선신문 발달사를 게재해 “무단무치의 대표 인물인 데라우치 총독이 조선을 통치하게 되니 조선의 언론계는 그의 일도지하(一刀之下)에 여지없이 말살되어 소위 어용지 매일신보 이외의 조선문(朝鮮文) 신문은 모두 잔명(殘命)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미년(己未年:1919년)까지 약 10년간은 조선 신문계의 암흑시기라 이를 수 있겠다”고 말했다.

대한협회 기관지였던 대한민보(大韓民報)는 물론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國民新報)까지 폐간됐으니 더 말할 나위 없었다. 총독부의 입 외에는 모두 봉쇄한 것이다. 친일이고 반일이고 한국어 언론은 안 된다는 것이 총독부 방침이었다. 언론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1911년 3월 9일 일본 중의원 의원 오다케(大竹)는 “총독부는 언론을 심하게 구속해 총독정치에 관하여 운운하는 것은 일의 여하를 묻지 않고 절대 금압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이 과연 그런가”(‘朝鮮關係 第27回 帝國議會議事經過摘錄’)라고 물었다.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또는 풍속을 난잡하게 할 우려가 있는 언론에 대하여는 상당한 취체를 하지만 공연히 언론을 구속하지는 않았다”고 천연스레 거짓으로 답했다.

오다케는 또 “총독부 측의 양언(揚言:뱃심 좋은 말)에 의하면 병합 후 조선인은 자못 총독정치에 열복하고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전연 이와 반대로 조선인은 커다란 실망을 가지고 아(我:일본) 시정(施政)을 원차(怨嗟:원망하고 탄식함)하고 있다고 하는데 진상은 과연 여하한가”라고도 물었다. 가쓰라 다로는 역시 “정부는 질문 제출자의 말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둘러댔다. 총독부의 총칼을 앞세운 폭압정치에 대한 한국인의 원차가 1919년의 3·1운동으로 거세게 표출되면서 세계의 비난이 들끓자 당황한 일제는 한 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식민통치 구조’ 끝. 다음 호부터는 ‘운동의 시대’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