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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브랜드 공연 ‘화선 김홍도’ 25~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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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호 04면

비취색 두루마기를 걸친 무동은 음악의 날개를 달고 그림 속에서 뛰쳐나와 3연속 공중회전의 현란한 묘기로 구경꾼들을 매혹시켰다. 대장간의 일꾼들은 익살맞은 노래를 부르며 노동의 고단함을 달랬다.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를 담은 조선의 ‘국민화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그 정지된 화면 뒤에는 어떤 소리가, 어떤 움직임이 숨어 있을까? 단원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는 정지해 있지만 움직임이 연상되고 소리가 없지만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국가브랜드 공연 ‘화선 김홍도’ 25~29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김홍도의 화첩을 통해 상상해 왔던 200년 전의 풍경들이 무대 위에 되살아났다. 어둑어둑한 박물관 유리장 속에 갇혀 있던 그림 속 인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노래하고 춤추며 일하고 길을 떠난다.지난 7월 3년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첫 무대에 오른 국가브랜드 공연 ‘화선 김홍도’가 제5회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의 폐막작으로 선정돼 더욱 완성도 있는 무대로 돌아왔다. ‘화선 김홍도’는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예술 콘텐트를 만들어 세계 무대에 선보인다는 목표로 국립극장 소속 3개 단체인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이 10여 년 만에 의기투합한 프로젝트.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출가·작가·안무가·작곡가들이 각자의 역량을 집결시켜 국민화원 김홍도의 작품 세계를 한 폭의 ‘그림 같은’ 가무악극으로 승화시켰다. 서민의 삶과 호흡을 함께했던 단원의 예술 세계에 걸맞게 친숙한 뮤지컬 배우들을 주연으로 세워 감미로운 음색과 귀에 감기는 멜로디로 대중의 기호까지 끌어안았다.

이 무대는 단원의 그림에 숨결을 불어넣은 우리 시대 예술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인간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던 단원의 마음은 배삼식 작가의 상상력으로 ‘사랑’을 덧입었다.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 단원의 연출감각은 손진책 연출의 상상력으로 판타지 세계로 확장됐다. 작곡가 김대성의 상상력은 우리 민족의 우연적 화성에 정통 뮤지컬 넘버의 감미로운 멜로디를 입혀 세계인에게 공명할 울림을 더했고, 안무가 국수호의 상상력은 200년 전 정지된 움직임을 현대적 감각의 세련된 역동성으로 살려 냈다.

음악과 춤이 더해져 3차원으로 확장된 단원의 작품 세계는 스토리와 무대 연출을 덧입고 다시 4차원의 판타지 세계로 탄생했다. 단원 그림 속 군상이 배경을 이루는 ‘그림 세계의 확장’이라는 하나의 줄기와 그 세계를 넘나드는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가 교차돼 작품의 이중 구조를 만들어 냈다. 선조의 삶의 모습을 흥겹게 반추하며 그 정서를 공유하는 씨실에 연인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의 감성을 날실로 엮어 보편적 공감대를 장치한 것이다. 민족적 정체성과 인류의 보편성이라는 명작의 조건을 두루 구비한 셈이다.

밥보다 그림을 좋아하는 두 친구 김동지와 손수재. 단원의 그림에 빠져 살다 정말로 단원의 ‘추성부도(秋聲賦圖)’를 통로로 그림 속 세상에 ‘빠지게’ 되고, 두 사람은 각자 그림 속에서 옛 연인과 어머니를 찾아 헤맨다. 두 친구의 여정은 그대로 단원의 풍속화 속 풍경이 되고, 그림 속 인물들은 스크린 속 2D 애니메이션으로 움직이다 3D로 그림을 뚫고 나와 무대 위를 누빈다. 이 무대의 압권은 그림 속을 넘나드는 순간의 표현. 주인공들이 타임라인을 넘어서는 순간을 공중그네에 매달려 소용돌이치는 그림의 통로를 헤쳐 가는 모습으로 형상화한 무대 언어는 마치 3D 아이맥스 영화를 보는 듯한 강렬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별다른 무대장치 없이 3중의 대형 스크린과 5대의 프로젝터를 이용해 환상적으로 구현한 영상 메커니즘은 ‘실제’를 끌어안는 ‘그림’의 존재, ‘한 세상도 결국 그림과 같다’는 작품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 친구의 상상여행은 결국 ‘인생의 달관’이라는 단원 작품 세계의 큰 주제로 귀결된다. 소년 김홍도와 노년 김홍도의 만남은 인생무상을 노래하기 위한 적절한 설정이다. 그림과 세상을 잇는 통로가 말년의 걸작 ‘추성부도’라는 점도 고도의 상징성을 내포한다. 자연의 영속성과 인생의 무상함, 덧없음을 탄식한 중국 북송시대 문필가 구양수(歐陽脩·1007~1072)의 문학을 소재로 한 이 그림에는 대조화원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절을 뒤로한 채 홀로 외롭고 가난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단원의 삶에 대한 관조가 녹아 있기 때문. 화가는 두 친구에게 연인과 어머니를 그려 주고, 이들이 그림 속에서 나누는 시공을 초월한 사랑은 절절한 뮤지컬 넘버와 함께 감동의 클라이맥스를 이루지만 그것은 꾸다 만 꿈처럼 허둥지둥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의 모래탑일 뿐. 다시 돌아온 세상도 그림 속 세상과 다르지 않으며, 언젠간 이 그림에서도 나가게 되리라는 두 친구의 깨달음 또한 단원의 일장춘몽의 인생관에 다름 아니다.

삶의 허무를 논하면서도 나비를 쫓아가는 소년 김홍도를 조명하는 엔딩. ‘그림 같은 세상, 세상 같은 그림’ ‘바람 같은 붓이 바람을 붙잡누나’라는 알쏭달쏭한 ‘선(禪)’의 세계관에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비의 몸짓과 같은 공허가 깃들지만 ‘흘러도 흘러도 다함이 없는’ 그림 속 세상에서나마 영원을 꿈꾸는 것. ‘국가브랜드’를 넘어 인간의 욕망과 그 한계라는 보편적 진실의 울림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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