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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상황

중앙일보

입력

줄거리

평화로운 오후, 그 속에 숨겨진 우리들의 일그러진 일상

한 소녀가 나를 빤히 들여다본다. 나보고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한다. 한동한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소녀가 내게 좋은 것을 주겠다고 나를 유혹한다. 하지만 소녀를 따라간 그곳엔...

난생 처음보는 포악한 사내가 있었다. 분노로 심하게 충혈된 그의 눈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왜 그렇게 한심하게 사냐고, 그가 나를 추궁한다. 포악한 사내가 속삭인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나의 그림을 찢어버린 여자, 바람을 피우고도 뻔뻔스런 꽃처럼 화려한 나의 애인, 나의 그림을 모욕하면서 나를 이용한 사진사, 뱀처럼 징그러운 놈, 나의 애인을 빼앗고 낡은 만화책처럼 만든 놈.

핏물이 묻은 손으로 고기를 주물럭거리는 나의 전우, 나를 저 고깃덩어리처럼 다뤘던 건 잊었나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난 이렇게 화가 나는데,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아무도 모른단 말야?

그림처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참하고 얌전한 일상 그러나 나는 이제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잔잔한 일상에 끊임없이 곤두박질하는 충동들을... 순간, 광포한 비명이 들려온다. 온순한 이웃... 그도 가슴속에 사나운 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어나보다.

리뷰

충무로의 비주류 김기덕 감독이 다섯번째로 관객들 앞에 던져놓은 신작이다.

데뷔작〈악어〉이래 새로운 미장센을 끊임없이 시도해 온 그였기에, 최근작〈섬〉을 둘러싼 논란이 채 가시기 전에 선보이는 〈실제상황〉이 관객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을 지 주목된다.

제작과정에서부터 최단시간 촬영이란 새로운 기록을 세워 이목을 끌었다. 당초100분내에 촬영을 마치겠다던 목표는 깨졌지만 3시간 20분, 즉 200분만에 한편의 영화를 모두 찍었다. 또한 11명의 시퀀스 감독들이 동원돼 시퀀스별로 개별연출이 이뤄졌고 35㎜카메라 8대와 디지털 카메라 10대가 따로 투입됐다.

〈실제상황〉도 그의 전작들이 걸어온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악어, 야생동물, 또는 창녀를 매개로 그 실체를 드러낸 인간의 본능은 이 영화에서도 중심 화두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는 인간의 충동이 새로운 형식에 담겼다고 보면 될것 같다. 스피드와 화려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각박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표상이 영화속 주인공 '나'(주진모)로 그려져 있는 게 아닐까.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나'는 감정을 억누르며 살고 있지만 언제든지 폭발시킬 수 있는 거친 공격성을 마음에 담고 있다. 그런 '나'는 그 공격성을 끝까지 거세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끄집어 내 자기를 괴롭혔던 주위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복수를 하고야 만다. 강도 높은 긴장감이 내내 팽팽하게 이어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인간의 본능, 충동을 드러내는 방법의 대담함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임에 분명하다.

자신의 본능을 감춘 채 지속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며 자극하는 소녀(김진아), 거머리같은 존재인 양아치 두목(이제락), 고시생에게 농락당하며 지친 삶을 끌어가는 옛 애인(김기연),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는 현재 애인(명순미) 등은 한결같이 '나'의 잠재된 공격성에 불을 지르는 존재들이다.

주진모는 모두 15개로 구성된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면서 20㎞가 넘는거리를 200분간 쉬지 않고 뛰어 다니며 연기해 관심을 모았다. 24일 개봉. (서울=연합뉴스) 이명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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