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열 번 싸워 열 번 이긴 청나라 군주, 건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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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건륭제
마크 C 엘리엇 지음
양휘웅 옮김, 천지인
429쪽, 2만2000원

중국 청나라의 영광을 대표하는 강희(姜熙)·옹정(雍正)·건륭(乾隆) 세 황제를 다룬 평전은 국내에 그리 많지 않다. 단 일급 읽을거리가 한두 권씩 있어 다행인데, 미국학자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이산)가 우선 꼽힌다. 이 책은 강희제가 1인칭 화자(話者)로 책의 전면에 등장해 자기 생애를 회고하는 방식이다. “짐(朕)은 오장육부를 드러내듯 속마음을 내보이노라”하는 식이다.

 꼭 옛 황제와 독대하는 느낌, 단 철두철미 공식기록·발언을 토대로 한 재구성이다. 일본 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이산)도 기억해둬야 한다. 양심적 독재 군주 옹정은 “천하를 다스리는 건 나 하나의 책임, 이 몸 때문에 천하를 고생시키진 않으리라” 호언했다. 그런 옹정과 그의 시대를 정교하게 그려낸 미야자키 책은 전형적인 일본 스타일이다.

 새 책 『건륭제』의 저자는 예일대 교수. 그는 너른 시야에서 건륭의 통치 59년(1736~95)을 살피는 게 특징이다. 즉 그의 통치기간은 18세기 한복판인데, 시종 계몽주의 유럽과 견줘가며 다룬다. 유럽이 근대의 길목에서 약진하던 무렵 만주족의 청나라 군주는 누구이며, 어떤 통치를 했을까?

 당시 중국은 1등 제국이자 슈퍼파워이었다. 인구도 유럽 전 인구의 세 배(3억)였고, 차(茶)·도자기를 팔아 엄청난 대유럽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아편전쟁(1840)으로 허우적대기 훨씬 이전인지라, 당시 그를 찾아온 유럽 외교관에게 건륭은 이렇게 일렀다. “우린 너희의 상품이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

 그건 영길리국(英吉利國·영국)의 사신 조지 매카트니에게 했던 말인데, 막상 자신은 서양 판유리로 황궁을 장식했으면서도 그렇게 당당했다. 철학자 볼테르도 철인왕(哲人王)이라고 평가했던 건륭은 혁신가라기보다 통합형 군주. 일테면 할아버지·아버지 강희·옹정이 만든 시스템을 허물지 않았다.

 주접제(奏摺制)·군기처(軍機處) 유지부터 그렇다. 옹정이 완성했던 주접제는 황제와 지방을 잇는 통신수단. 건륭 역시 주접을 통해 대륙을 장악했다면, “소규모 전시내각”인 군기처를 유지시켜 중앙을 컨트롤했다. 동시에 정복왕이다. 스스로를 십전노인(十全老人·10번의 큰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라 자부했듯 위구르·티베트를 편입시켜 다민족 국가 중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문사철(文史哲)과 미술품 컬렉션에도 밝았다. 기본적으로 입문서인 이 책은 건륭 재평가에 충실하다. 청나라 몰락 이후 20세기 중·후반 내내 건륭은 “악당”(354쪽)에 가깝게 이미지가 추락했다. 중국 낙후의 상징으로 몰린 것이다. 현대중국의 성공 뒤 강희·옹정·건륭은 최고의 지도자로 다시 떴다. 이런 대반전 국면에 등장한 멋진 읽을거리인 이 책은 건륭이 “중국 영화(榮華)의 마지막 순간”을 다스렸던 황제, 그러나 배부름과 자족(自足) 때문에 근대세계 합류에는 한 발 늦었던 아이러니 속의 군주임을 함께 보여준다.

조우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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