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총명이 지나쳐 삶이 고통스러웠던 조선 여인, 초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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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난설헌
최문희 지음, 다산책방
379쪽, 1만3000원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반드시 행복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서로의 체온을 묻히고, 서로의 지문을 가슴에 감으면서 서로의 숨결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이 결혼이라는 만남일까.”

 리모컨을 돌리다 마주친 어느 드라마 대사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결혼을 앞둔 열다섯 처녀가 나지막이 읊조린 말이라니, 어쩐지 애잔하다.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문제에 ‘주체’로 참여할 수 없었던 조선의 여인들에게 그 고민의 무게는 지금보다 더 무거웠을 테니까.

 여덟 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시를 써 온 이 여인에게는 더욱 그랬다. 이름은 초희, 우리에게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누이로 잘 알려진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89)이다.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서 태어난 것이 한”이라 했던 시인.

 난설헌의 삶이 소설로 나왔다. ‘제1회 혼불문학상’을 거머쥔 최문희 작가의 『난설헌』이다. 일흔을 훌쩍 넘긴 노작가가 그 내공을 증명이라도 하듯 섬세하게 빚어냈다.

 소설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집에서 자란 난설헌이 가부장적 질서가 견고한 시댁에 들어가 겪는 고통을 면밀히 다룬다. 시어머니와의 불화, 총명한 부인을 부담스러워하는 남편과의 어긋남으로 그녀의 삶은 점점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시댁은 ‘감옥처럼’ ‘앞뒤가 막막한 절벽’으로 느껴졌다. 그런 감옥에서 난설헌이 택한 것은 시를 쓰는 일이었다. ‘코끝에 스미는 은은한 묵향’을 느끼며 먹을 갈고, ‘아녀자가 가까이 할 물건이 아니라 하기에 더더욱 애틋한 지필묵’을 바라보면서 그는 시를 썼다. 시를 쓰며 시숙모 영암댁과 나누는 우정은, 당시 여인들이 갈망한 ‘소통에의 욕구’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말이 아닌 붓으로 자신의 아픔을 호소할 수 있고, 그것을 읽어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을 쉬고 밥 먹을 보람을 찾은 것 같아 새삼 생기가 돌고 식욕이 났다.’

 소설을 다 읽을 때쯤이면 옛 여인을 향한 안타까움과 애잔함이 가슴에 차오른다. 무엇보다 문장마다 새겨 넣은 우리말, 곳곳에 배치된 난설헌의 시가 곱다.

임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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