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제가 키우게 해주세요” 여 판사가 절규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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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서울가정법원에서 이은정·이광우·김현진 판사(왼쪽부터)가 각각 남편·판사·부인 역할을 맡아 ‘이혼법정’ 상황극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태수 부장 판사. [김성룡 기자]

“글쎄, 아이는 엄마인 제가 키운다니까요.”(부인)

 “판사님, 저 여자는 얼굴은 착해 보여도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남편)

 26일 서울 서초동 서울가정법원 711호실. 답답하다는 듯 남편이 판사를 향해 의자를 돌려 앉았다. “1년 넘게 집 나갔다 이제 돌아와서 양육권을 달라는 게 말이 됩니까?” 아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내가 집 나간 게 누구 탓인데요. 일중독인 당신 때문이잖아요. 다른 건 필요 없고 아이만 주면 돼요.” 이혼 법정의 모습 같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고성을 주고받던 ‘남편’과 ‘아내’가 모두 여성이었던 것. 서울가정법원의 이은정(38), 김현진(38) 판사다. 판사들이 이런 상황극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 해 서울가정법원에 접수되는 이혼사건은 1만2000여 건. 이혼 청구를 받아들일지 여부부터 양육권, 재산분할까지 당사자들이 첨예하게 날을 세우다 보니 ‘조정자’로서의 판사 역할이 쉽지 않다. 판사가 이혼 사건 조정 중 무심코 “힘드셨겠어요”라고 말했다가는 “한쪽 편만 든다”는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서울가정법원은 고심 끝에 올 초 가사5부 이태수 부장판사를 중심으로 ‘법정언행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이혼사건 처리를 위해 ‘갈등 조정법을 공부하자’는 취지였다. 문용갑 한국갈등관리·조정연구소 소장을 강사로 초청한 판사들은 지난 7월부터 점심시간을 이용해 공부모임을 열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인 이날 모임엔 판사들과 조정위원 등 11명이 참석했다. 교재는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s. Kramer)’. 더스틴 호프먼과 메릴 스트리프가 주연한 이 영화의 한 대목을 보고 1시간 30분에 걸쳐 상황극을 해보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상황극이 끝나자 문 소장은 “누구에게 먼저 발언권을 줄지, 발언 시간을 얼마나 줄지부터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구부터 말할지에 관한 결정권을 부부 자신들에게 주는 겁니다. 또 조정 중 한쪽이 화를 낼 경우 ‘화를 내시면 안 되죠’라고 제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화가 나셨군요’라는 말로 당사자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편이 더 낫습니다.”(문 소장)

 문 소장은 “부부간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상황극을 했던 이은정 판사는 “그동안 재판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 입장이 돼보니 당사자의 감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글=김현예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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