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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전문 경영인 시대 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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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 체제냐, 전문경영인 체제냐.”

경제학에서 답이 없는 몇 가지 문제 중 하나이다.

학자들간에 대체적이나마 의견 일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재벌개혁감시단장을 맡고 있는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학)
는 심지어 어느 한 쪽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면 경제학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선험적으로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유럽 대기업의 60% 이상이 오너가 경영하는 회사들이고, 미국도 기업의 숫자만 놓고 보면 70% 이상이 오너 체제이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이의범 가로수닷컴 사장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중소기업은 오너가 중심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전문경영인 체제가 만병통치약일 순 없다. 당연히 전문경영인 체제를 채택한다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최태원 SK㈜ 회장은 “기업이 잘 될 때는 전문경영인 체제가 좋지만 나빠질 때는 오너 체제가 낫다”고 말한다. 지난 달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특강에서 그는 “외환위기 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실상 청산됐어야 할 기업들이 전문경영인 체제의 한계로 청산되지 못했다”며 “전문경영인 체제가 외환위기의 여러 원인 중 하나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후발 롯데가 신세계를 제치고 유통업계를 ‘평정’한 것을 롯데 오너 체제의 공으로 돌리는 시각도 있다.

80년대 초반 명동상권의 한계에 부닥친 백화점들은 부도심권인 영등포로 진출했다. 당시 이미 전문경영인 체제의 틀이 잡혀 있던 신세계는 롯데보다 한 발 앞서 영등포 상권을 선점했다.

영등포의 승자는 그러나 초대형 도심형 백화점으로 대응한 후발주자 롯데였다. 상권 규모에 걸맞은 중규모 백화점을 지은 신세계는 패배를 맛봤고, 이는 선두주자 신세계가 롯데에 밀리는 분기점이 됐다.

이어 롯데의 오너 신격호 회장은 일본 롯데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잠실에 롯데월드를 ‘축성’(築城)
, 스스로 상권을 창출함으로써 유통업계의 왕좌를 차지한다.

같은 80년대 초반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고 90년대 초반 현대중공업이 도크 확장을 결행한 것은 한국재벌사에서 오너 경영의 백미(白眉)
로 꼽힐 만한 사례들이다. 세계화·정보화로 세상이 급변하기 전 일이지만.

그렇다면 왜 전문경영인 체제인가? 우리나라엔 사실상 오너체제라는 기업 모델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경영인을 대표이사로 앉히고도 최후의 의사결정은 늘 오너들이 독점해 왔다. ‘황제경영’이란 이렇게 의사결정권을 독점하면서도 경영상의 책임은 지지 않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동아그룹의 오너였던 최원석 전 회장은 지난해 봄 “전문경영인들이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외형 위주의 방만한 경영을 일삼은 게 부실을 불렀다”며 “경영은 오너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전문경영인 1세대인 이명박 전 현대건설 회장은 그러나 “그(최원석 회장)
가 정말 자신에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을 전문경영인들에게 주었는지는 의문”이라며 “전문경영인 사장이 아니라 ‘사장급’ 직원으로 부렸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오너 모델만 존재하다 보니 기업이 경영에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오너 체제에 기인하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했다. 만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기업들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간다면 두 모델의 장단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임은 물론 각 모델들에 대한 수정도 가해질 수 있을 것이다. 전문경영인 체제 정착의 필요조건은 무엇일까?.

첫째, 책임경영 체제의 확립이다. 전문경영인 체제란 곧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 체제를 말한다. 전문경영인 출신의 최고 경영자가 자율적으로 기업의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체제다.

사실 대부분의 국내 대기업들은 오너 중심의 지배구조가 문제이지, 전문경영인 체제는 이미 구축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김교수는 이같은 책임경영 체제의 출발점은 현대 좌장그룹에 대해 이미 확인된 불법·부실 경영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에서 시작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두번째로 최고 경영자의 경영성과를 기관투자가·소액주주·채권단·종업원 등 이해관계자들이 사전에 또는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 나아가 경영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감시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오너의 암묵적인 경영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부의 견제장치로서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총수로부터 독립되고 주주 등 기업의 이해관계자를 대변하는 사외이사는 이사회의 멤버로서, 사전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외이사가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이들 이해관계자가 실질적으로 사외이사 추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적으로 대형 상장법인의 경우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가 총수로부터 독립적인 인사들로 구성돼야 한다.

이해관계자가 대주주측의 전횡으로 본 피해를 신속하게 회복하기 위한 사후적 장치로 집단소송제도의 도입도 검토할 시점이 됐다. 재벌기업이 무너지면 국민경제가 치명타를 입고 그 피해는 오너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경영권에 대한 보호막도 걷혀야 한다. 경영권의 이전, 즉 적대적인 M&A가 시장에서 일어날 수 있어야 한다.전문경영인들은 오너나 주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단기승부에 집착하고 긴 안목이 요구되는 큰 승부와 결단에 약하다는 지적도 있다. 재계를 떠난 지 8년 된 이명박 전 회장은 자신이 전문경영인으로서 성공한 비결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전문지식·정보면에서 오너보다 앞설 뿐더러 회사에 대한 애정도 더 깊어야 한다. 둘째, 소신껏 일하기 위해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한다.

셋째, 오너와 알력이 생기지 않도록 지나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 새 경영환경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둘째와 셋째 원칙은 역설적으로 이 나라 전문경영인의 생장환경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말해 주고 있다.

오너가 질 책임만 잔뜩 떠안고, 권한도 별로 없으면서 상대적으로 보수도 적은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이 설자리가 비로소 마련될지 지켜볼 시점이다. [이코노미스트=이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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