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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굵은 외모 묵직한 음성, 시낭송 솜씨 최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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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호 09면

1983년의 양명문 시인(오른쪽). 왼쪽은 부인 김자림씨. [중앙포토]

얼마 전 우리나라 최초의 클래식 음악감상실인 대구 ‘녹향’의 주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녹향’은 6·25전쟁 때 대구로 피란 간 유치환·박목월·양주동 등 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곳으로 유명하고, 특히 바리톤 오현명이 부른 가곡 ‘명태’의 노랫말이 된 시 ‘명태’를 양명문이 그곳에서 썼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1970~80년대 양명문 시인과 김자림 희곡작가 부부의 몇 가지 모습이 떠올랐다. 베레모를 쓰고 스틱(단장)을 속된 말로 ‘폼 나게’ 휘두르던 양명문의 모습과, 다소 작고 통통한 몸매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연극 공연 자료를 들고 동분서주하던 김자림의 모습이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33> ‘명태’의 시인 양명문

이들 부부는 같은 평양 태생으로 1·4후퇴 때 각각 단신 월남한 뒤 부산에서 처음 만나 훗날 13년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1913년생인 양명문은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전수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40년 시집 ‘화수원’을 내고 일본 문단에 데뷔했다. 광복을 맞아 귀국한 양명문은 평양에서 문학 활동을 하던 중 공산주의자들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김일성 찬가’를 쓰기도 했다.

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함락했을 때 양명문을 비롯한 박남수·김이석·오영진·장수철 등 평양 문인들은 일찍 월남했다가 고향을 찾아온 최태응과 납북된 아버지를 찾아온 조지훈 등과 함께 ‘평양연합예술회’를 결성하고 남북 문화인 교류를 결의했다. 하지만 이들은 구체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전에 중공군 개입 소식에 피란을 서둘러야 했다. 대부분의 평양 문인이 피란을 결심한 가운데 양명문은 ‘김일성 찬가’의 전력 탓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하다가 피란을 결심한 평양 문인들의 간곡한 설득에 양명문도 결국 피란 대열에 합류했다.

월남 후 한동안 부산 부두에서 노무자 생활을 하기도 했던 양명문은 대통령 공보비서관이던 김광섭과 국방부 정훈국장이던 김종문의 배려로 육군 종군작가단에 편입됐다. 육군 종군작가단은 공군·해군 종군작가단과 함께 일선에 투입되기도 하고, 기관지 ‘전선 문학’을 발간하는가 하면, ‘국군의 밤’ 방송·시국 강연·군가 작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양명문도 최초의 문인극 ‘고향 사람들’에 출연하고 군가를 작사하는 등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무렵 그는 국방부 정훈국이 마련해준 안동 집에 기거하면서 대구와 부산을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안동 집에는 역시 월남한 작곡가 변훈·김동진 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양명문은 그가 쓴 시 몇 편을 두 작곡가에게 보여주면서 혹시 가곡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이때 변훈은 ‘명태’를, 김동진은 ‘낙동강’을 선택해 가곡을 만들었다.

가곡 ‘명태’에는 얽힌 일화가 있다. 이듬해인 52년 부산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오현명이 ‘명태’를 불렀을 때의 일이다. 중간쯤에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관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가곡 공연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더군다나 이튿날 음악평론가 이성삼은 한 신문에 쓴 음악평에서 ‘명태’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변훈은 그때까지 만든 가곡들을 모두 찢어 없애버리고 작곡가의 길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변훈이 작곡가에서 외교관으로 변신한 것은 이때부터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양명문은 서울대 등 몇 개 대학에서 강의를 맡다가 60년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의 아내 김자림도 그 무렵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방송극과 영화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 시선을 끌기도 했지만 김자림은 ‘본업은 어디까지나 희곡작가’임을 늘 내세웠다. 연극 일에 관한 한 늘 열정적이었고, 특히 그의 작품을 공연할 때면 마치 신들린 듯했다.

한데 그를 만날 때마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연신 시계와 수첩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좌불안석하는 모습이었다. 처음엔 워낙 바빠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편의 스케줄과 행보를 낱낱이 체크하는 것이었다. 주변 문인들은 멋쟁이 남편을 둔 아내의 ‘보호 관찰’이라 표현했다. 남편도 아내의 그런 ‘특별한 배려’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사실 양명문의 예술가적 기질과 풍모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유명해 여성들에게도 꽤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같은 실향민이며 절친한 후배인 김시철은 양명문의 풍모를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남달리 굵어 보이는 눈썹, 올백으로 넉넉하게 빗어 넘긴 숱 많은 곱슬머리, 지긋이 아래로 내리까는 눈매, 굵은 톤의 묵직한 성대, 체구에 잘도 어울리는 한복과 두루마기, 턱 들고 뒤로 젖히는 의젓한 폼…’.

그런 외양뿐만 아니라 최고로 꼽히는 시 낭송 솜씨라든가 여성을 대하는 세련된 매너 등 하나하나가 여성들에게 호감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그런 남편을 한눈 팔지 못하게 하는 김자림의 ‘보호 관찰’은 아내로서의 특권이었고, 그것이 문단이 두루 인정한 ‘잉꼬 부부’의 결정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들 부부는 서로의 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늘 붙어 다녔다. 문단의 행사나 문인들의 모임에 그들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85년 11월 양명문이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김자림이 받은 충격은 컸다. 장례 후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양명문의 1주기를 맞아 남편과 가까웠던 많은 사람을 초청해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양명문 시인 추도 문학의 밤’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날 오현명은 ‘명태’를 불러 고인을 추모했다. 91년 미국으로 이민한 김자림은 94년 시애틀에서 68세로 타계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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