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아의 여론女論] 내가 서울 여시장 된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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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1934년 6월 잡지 『삼천리』에 흥미로운 설문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제목은 ‘내가 서울 여시장 된다면?’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황에스터(黃愛施德, 독립운동가), 우봉운(禹鳳雲, 사회주의운동가), 장덕조(張德祚, 소설가), 이선희(李善熙, 기자), 나혜석(羅蕙錫, 화가), 김자혜(金慈惠, 기자), 김선초(金仙草, 가수) 등 당대 유명 여성들이 답했다.

 몇몇 여성들은 자신이 서울의 시장이 된다는 가정(假定)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선희는 자신이 시장이 되면 모든 서울시민에게 영양주사를 한 대씩 놓고, ‘댄스홀’을 백 여 곳 만들어서 남녀노소 모두 춤추게 만들고, 자신과 같은 여기자를 특별대우하지 않는 자를 처벌하겠다는 등의 다소 허황된 ‘공약’을 남발한다. 시민들의 허영심을 근절하기 위해 화장품 세금을 100배 인상하겠다는 우봉운의 말도 실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김자혜는 금주단연령(禁酒斷煙令)을 내린 뒤 전매국과 양조장 시설을 노숙자 수용소로 만들겠다는 나름의 구체적 방안을 말하면서도 “그러나 모두 농담이지요. 제가 서울 여시장이라니 천지개벽을 하게요”라며 자신이 서울시장이 된다는 상상 자체를 부정한다. 가수인 김선초도 자신이 시장이 된다는 것은 음반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한 축도 있었다. 황에스터의 경우에는 자신이 시장이 된다면 남녀의 동등권 부여, 유곽 철폐, 무직자 재활 시설 설치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장덕조는 공중위생과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 직업부인을 위한 시영 탁아소를 창설하겠다고 선언했다. 나혜석은 전차의 노선 변경, 조선인 시가지의 전기시설 완비, 여성단체의 조직을 자신의 목표로 제시했다. 이들은 서울시의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퇴폐시설을 없애며, 여성들의 행복한 사회생활을 원조하는 것이 서울의 시장으로서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임무라고 생각했다.

 근 80년 전 황에스터, 장덕조, 나혜석 등이 ‘상상’해본 서울은 이제 ‘현실’이 되었나? 별로 그렇지 않은 듯하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에서도 여전히 비슷한 내용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80년 전 그녀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줄 ‘진짜’ 시장이 선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보들의 이미지나 말이 아닌 행동과 진심을 보고 선택해야겠다. 그리고 ‘꼭’ 투표해야겠다.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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