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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화 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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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남윤호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몇 년 전 광고카피 덕에 유행했던 말이다. 양극화 탓일까, 이게 요즘 ‘열심히 일한 당신, 손가락 빤다’는 자조로 바뀌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살림은 더 어려워졌다고 불만 터뜨리는 분들, 부쩍 늘었다.

 이들의 눈에 비친 대기업은 어떤가. 짱짱하게 잘 나간다. 뭉텅뭉텅 돈을 빨아들이면서도 잘 풀진 않는다. 그뿐인가. 땅 짚고 헤엄치기 하는 듯한 금융회사들은 돈잔치를 벌인다. 이게 도대체 제대로 된 세상인가. 불만이 좌절로, 다시 분노로 이어진다. 월가 점령 시위를 계기로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집회와 시위도 그런 분노의 표출이다. 눌려 있던 압축가스가 터져 나오는 기세다. 이런 불만, 경제적 약자들만 지니는 게 아니다. 비교적 괜찮은 중간층들에도 쉽게 전염된다. 실제 며칠 전 “하는 일 없이 수십억원을 받는 은행장들을 왜 가만 놔두냐”고 부아를 내는 40대 직장인을 봤다. 또 “금붙이 물고 태어나 떵떵거리는 재벌이 제일 밉다”는 외국기업의 30대 중간관리자도 만났다. 그의 연봉은 1억원이 넘는다고 했다.

 그들의 상대적 박탈감, 보통이 아니다. 논리적 설명은 들으려 하질 않는다. 대신 화를 돋우는 말에 귀를 더 기울인다. 오죽하면 억대 연봉자가 시위대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는가.

 인도 출신의 경제학자 자그디시 바그와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궁핍화 성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원래 수출을 많이 해도 교역조건이 나빠져 먹고살기 더 어려워진 개도국 경제를 가리킨다. 대기업 중심으로 경제는 성장하지만, 중소기업과 서민은 가난해지는 양극화와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이는 하루이틀 새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근본적으론 국제화의 부산물이다. 여기에다 무한한 저임 노동력을 지닌 중국이 바로 우리 옆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선 힘 센 대기업은 아랫목을 차지하지만, 그 외엔 냉골이다. 또 대기업은 돈을 벌어도 사람을 많이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타난 게 고용 없는 성장이다.

 야권에서 공격하듯 국가의 지배구조가 뒤틀려 그런 건 아니다. 2005년 세계은행이 80개국을 상대로 국가 지배구조를 비교한 결과 우리나라는 21위였다.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보다 낫다 하니, 나쁘지 않은 수준이다.

 원인은 국제적 차원에서 비롯한 것인데, 대응은 국내적으로 할 수밖에 없으니 지배구조가 좋건 나쁘건 묘책을 찾기 어렵다. 분배를 강조하던 노무현 정부도 결과적으론 엄청난 양극화를 낳지 않았나. 불행히도 단숨에 풀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곡차곡 쌓이는 사회적 불만은 정권 교체의 토양을 만들기 쉽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노무현 정부 후반기인 2006년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선거에선 여당이 질 것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 이겨 집권하는 여당은 5년 뒤 선거에서 또 질 것이다.”

 그는 최근 한 토론회에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자꾸 심해지는 양극화를 염두에 둔 얘기였다. 이를 해결하려면 특단의 개혁이 필요한데 어느 정권도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체념이 다소 섞여 있었다.

 실제 한나라당이 집권에 성공했고, 지금은 코너에 몰리고 있다. 그의 말대로면 여야가 한 번씩 양극화의 역풍(또는 혜택)을 겪는 셈이다. 번갈아 권력을 잡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다시 넘겨주는 게 마치 시계추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동안 궁핍화 성장은 결국 성장의 궁핍을 낳지 않을까 걱정이다. 과연 ‘이 놈의 국제화’는 성장과 궁핍 가운데 무엇을 더 많이 안겨줄 것인가. 답은 열심히 일한 당신이 냉정하게 찾아야 한다.

남윤호 중앙SUNDAY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