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이탈리아 등급 낮춰 GDP·부채 그리스의 6배 위기 번지면 속수무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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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호 20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지난달 비농업 취업자 수는 8월보다 10만3000명 늘었다. 당초 6만 명이던 예상치를 뛰어넘은 것은 분명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미국 주가는 하락했다. 유럽발 악재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다. 국제 신용평가업체인 피치는 7일 이탈리아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강등했다.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최근 이탈리아 신용등급을 낮춘 데 이은 조치다. 피치는 스페인의 신용등급도 AA+에서 AA-로 두 단계 낮췄다. 이들 국가의 신용등급 전망도 ‘부정적’으로 유지해 앞으로 더 낮출 여지를 남겼다. 스페인은 낮은 성장률과 늘어나는 재정적자가, 이탈리아는 대규모 공공부채와 정치적 불안 등이 등급 하락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유럽 신용등급 연쇄 강등 여파

이탈리아 대학생들이 7일(현지시간) 높은 청년실업률과 교육예산 삭감에 항의해 시위를 벌였다.

이에 앞서 무디스는 영국과 포르투갈 은행 21곳의 신용등급을 무더기로 내렸다. 금융시장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중소 은행이 무너질 수 있는데, 정부가 모든 은행이 살아남도록 지원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이유였다. 유로존 국가들은 그리스의 디폴트 위기가 금융 경색을 가져오고, 이에 따라 부채가 많은 이탈리아에 위기가 전염돼 이 나라의 국채를 많이 갖고 있는 프랑스까지 불똥이 튀는 최악의 상황만은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9일에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만나 유럽 재정위기 해법을 논의한다. 17일부터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유럽 정상회의를 앞두고 공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리스 사태가 이탈리아로 번지는 것을 막는 게 핵심인데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것이 문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이탈리아의 국내총생산(GDP)은 1조5393억 유로다. 독일과 프랑스에 이어 경제규모로는 유로존 3위다. 공공부채 규모는 1조9000억 유로로 GDP의 119%에 달한다. 지난해 GDP가 2245억 유로인 그리스와는 체급이 다르다. 그리스는 부채비율이 GDP의 143%로 높지만 최악의 경우 4400억 유로 규모로 확대하고 있는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으로 막을 수 있지만 이탈리아까지 문제가 생기면 속수무책이다.

이탈리아 국채의 절반을 해외 투자자들이 갖고 있다. 앞으로 5년 안에 만기가 돌아오는 국채만 9000억 유로에 달한다. 차환 발행에 문제가 생기거나 금리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치명적이다. 당장 14일에는 71억5000만 유로의 이탈리아 국채 만기가 돌아온다. 현재 10년 만기 이탈리아 국채의 수익률은 5.49% 수준이다. 독일 코메르츠방크 외르크 크레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수익률이 1%만 올라도 이탈리아는 연간 20억 유로의 이자를 더 지급해야 한다”며 “금리가 6%를 넘어가면 이탈리아 정부가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성장률이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0.2%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유로존 평균인 1.1%보다 낮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이탈리아의 올해와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각각 0.6%와 0.3%로 낮췄다. 정치적 불안도 악재다. 잇따른 스캔들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줄리오 트레몬티 재무장관과 이견을 보이고 있다. 트레몬티 재무장관은 재정적자 감축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최고의 부자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세금 인하로 성장률부터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7일에는 500억 유로 규모의 정부 긴축안에 반발한 대학생들이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제력이 월등한 북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북부동맹과 불안한 연정을 이어가고 있는 베를루스코니 총리 입장에서는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기보다 2013년 총선까지 어떻게든 버티려 한다. 프랑스 BNP파리바의 루이지 스페란차 이코노미스트는 “베를루스코니 총재는 고소득층을 대상으로 한시적인 연대세(solidarity tax)를 도입하겠다고 나섰다가 슬그머니 철회했고, 북부동맹의 반대로 연금 개혁도 흐지부지됐으며, 지방자치단체 통폐합 안도 공무원의 반발로 후퇴했다”며 “이탈리아의 리더십 공백은 유로존 전체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CB 차기 총재로 내정된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는 “ECB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재정위기 국가들의 국채를 무한정 매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이탈리아가 휘청거리면 이탈리아 국채를 많이 보유한 프랑스 은행에 치명적이다. 지난달 14일 프랑스의 2~3위 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과 크레디아그리콜이 그리스 채권을 많이 갖고 있다는 이유로 신용등급이 한 단계 강등됐다. 프랑스와 벨기에 합자은행인 덱시아도 그리스 국채 보유량이 많아 위기설이 돌며 4일 하루에만 3억 유로의 예금이 빠져나갔다. 양국 정부는 긴급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경량급인 그리스의 악영향이 이 정도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프랑스 은행들이 그리스에 물린 채권 규모는 567억 달러 수준이다. 하지만 이들이 갖고 있는 이탈리아 채권은 4000억 달러에 육박한다. 독일(1600억 달러)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번 주 국내 증시는 유로 위기의 여파가 이어질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깜짝 실적’을 발표하는 등 국내 기업의 실적 전망이 나아지고 있지만 해외발 악재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김세중 신영증권 이사는 “포르투갈·이탈리아를 넘어 영국까지 신용등급 강등이 확산하고 있는 것은 위기가 전염되고 있다는 뜻”이라며 “유럽은 이제 재정위기가 금융위기뿐 아니라 실물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김수영 K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등급 강등이 이어지다 보니 투자심리가 불안해져 증시 변동성이 확대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정용택 KTB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이탈리아 신용등급 하락의 부정적 영향은 있겠지만 그만큼 유럽 국가들의 공조를 압박하는 긍정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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