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코드2000, 우리나라 아파트 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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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도시 전체를 아파트로 채울 수가 있지요? 그로테스크한(기괴한) 발상 아닙니까?"

최근 주택산업연구원을 방문한 영국과 홍콩의 주택 관계자들이 분당 신도시 얘기를 듣고 보인 첫 반응이다.

그러나 현장을 둘러본 뒤에는 상당히 달라진다. "뜻밖에 도시기능에 큰 무리가 없군요. 중산층만 몰려 사는 고층 아파트 도시라… 놀랍습니다." 비록 엄청난 단지 규모에 기겁을 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한국은 아파트의 나라다. 싱가포르.홍콩 등의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아파트 거주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1999년말 현재 전국의 주택 수는 1천1백만호, 이중 43%인 4백72만호가 아파트다(건교부 추계). 아파트의 비중은 해가 갈수록 더욱 늘어나 올해는 50%를 돌파하리라는 전망이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대단위.고층이라는 점 외에도 대부분 중산층이 산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택산업연구원의 장성수 연구위원은 "아파트는 서양에서 공장 노동자의 기숙사나 저소득층 근로자용으로 지어진 것이 시초" 라고 설명하고 "중산층의 주된 주거형태로 자리잡은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 이라고 말했다.가까운 일본만 해도 아파트는 대부분 서민용의 임대형태며 대단위 단지를 이룬 곳은 없다고 한다.미국.캐나다.영국 등 서구국가의 경우 도심의 서민아파트들이 슬럼화해 더 이상 짓지 않는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산업화.중산층 확대와 맞물리며 급속히 확산했다. 최초의 아파트는 57년 완공된 서울의 행촌아파트. 3층짜리 4개 동에 불과했다. 뒤이어 62년 6층짜리 마포아파트가 건설됐다.

이 시절 아파트는 낯선 서양 풍의 주거였다. 한 잡지는 모윤숙 시인의 '문화주택에 살아보니' 라는 체험기를 실을 정도였다. "포도주를 한잔 들면서 파리의 센강을 보듯 한강을 바라본다" 는 글이 남아있다. 대체로 서민용이었던 아파트는 70년대 들어 중산층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서울의 강남이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됐다. 좁은 땅위에 급증하는 도시인구를 효과적으로 수용하는 유일한 대안이 된 것이다. 주공 주택연구소 이규인 연구원은 "도로.철도.상하수도 등을 최소한으로 건설하면서 주거문제를 해결하려면 밀집.대단위 건설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고 설명했다.

영동.반포지구에 중상류층 대상으로 큰 단지를 짓기 시작하면서 아파트는 고급 주거로 자리 잡았다.중앙집중식 난방에다 수도에서 더운 물이 나오는 입식 부엌, 수세식 화장실은 주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서울 강북의 평창동.후암동 지역 부촌 주민들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땅값이 개발붐을 타고 75~91년에 매년 20%씩 22배나 올랐다. 사두면 돈이 된다는 인식이 겹치면서 아파트는 중요한 재산증식.투기대상으로 떠올랐다.

70년대 중반부터 시행된 국민주택 청약부금제는 중산층 샐러리맨에게 우선적으로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보급률을 높였다. 이후 80~90년대를 거치면서 수도권에 신도시 5곳이 아파트 일색으로 건설되는 등 신규 주택단지는 모두 아파트로 지어졌다.

90년대 들어서는 지방 중소도시는 물론, 농촌에도 아파트가 들어섰다.경상도나 전라도 시골길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논바닥에 20~25층의 고층아파트가 한두채 덩그라니 서있다. 이른바 '논두렁 아파트' 다.전국의 군 단위 지역 중 아파트가 없는 곳은 2~3곳에 불과할 정도로 이제는 보편화했다.

도시연대의 최정한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아파트 생활이 편한데다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농촌사람들의 의식까지도 도시적인 것을 동경하게 된 결과" 라고 진단했다.

이제 '내 집 마련' 이라는 구호는 아파트 한 칸을 마련한다는 뜻이 됐다. 국민들이 아파트를 좋아하는 이유는 많다.

서울부동산의 정용현 대표는 "사람들이 아파트 문화에 이미 젖어있기 때문에 아파트에 안 살면 불편해 하고 치안문제를 불안해 한다" 고 설명한다.환금성 문제도 크다. 아파트는 2개월이면 나가지만 단독주택은 1년 넘도록 안 팔리기 십상이다. 매년 전체가구의 25%가 이사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대표는 "단독주택에는 아파트를 못 구하는 저소득층이 주로 산다" 며 "1층에 집주인이, 지하 두 곳과 2층 한 곳에 세를 주는 것이 일반적" 이라고 말한다. 95년도 센서스에 의하면 아파트 한채에는 평균 1.007가구가 사는데 반해 단독주택에는 1.78가구가 산다.

통계청의 '한국의 사회지표' 에 따르면 도시지역 거주자의 아파트 선호 비율은 87년 28%→92년 41%→96년 48%로 늘었다. 올해 시행된 한 조사에 따르면 이사를 하면 아파트에 살겠다는 응답이 77%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학작품에 나타난 아파트에 대한 인식도 바뀐 지 오래다. 박범신은 60년대 한 소설에서 아파트를 '성냥갑같이 똑같고 사방이 밀폐된 곳' 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80년대 박완서의 '서울 사람들' 은 중산층의 자부심과 무관심을 말하고 있다.

"연탄을 안 갈고도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전혀 모르고 지낼 수 있었고 기후에 대한 무관심은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야들야들하리만치 편리에 길든 얼굴은 내 얼굴이자 이웃들의 얼굴" 이라 쓰고 있다.

편한 것만 찾으면서 이웃에 무관심한 현상은 2000년대를 맞은 오늘날 더욱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산업화 바람을 타고 달라진 주거문화는 이런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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