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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렁이는 증시에 멀미난 투자자들, 미국·일본 국채로 ‘엑소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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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통화 가치 하락에 따른 채권 시장의 자금 이동이 빨라지고 있다. 통화 약세에 빠진 신흥국에서 빠져나온 자금은 일부 ‘초안전 국가’의 채권으로 몰리고 있다. 4일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신흥국 채권형 펀드에서 지난주에만 32억 달러가 빠져나가며 사상 최대의 자금 유출을 기록했다. 빠져나간 돈의 절반이 넘는 16억5000만 달러는 해당국 통화로 표시된 신흥국 채권이었다. 미래에셋증권 이재훈 연구원은 “신흥국 통화 약세와 맞물리며 투자 자금이 차익실현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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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원화가치의 급락이 이어지는 한국 시장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날 장중 한때 달러당 원화가치가 1200원 아래로 내려가자 증권가에선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이 본격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증권가에선 1200원 선을 국내 주식과 채권 시장에 들어와 있는 달러 투자자금이 환차손을 볼 수 있는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현대증권 이상원 연구원은 “환율의 변동성이 커지면 외국계 자금의 유출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달러당 원화가치 1200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화가치 약세에도 국내 채권시장은 크게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우리투자증권 박종연 연구원은 “개천절 연휴 전인 지난달 30일 외국인이 1조원가량의 채권을 사들였고 환율이 흔들렸던 4일에도 외국인이 이탈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며 “신흥국 등에서 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4일 채권시장에서 아시아 중앙은행과 템플턴 등이 원화 채권을 사들인다는 소식에 채권 금리는 전날보다 0.09%포인트 급락했다.

 

신흥국을 떠난 돈은 미국와 일본 국채로 몰리고 있다. 증시의 급등락이 잦아지고 신흥국을 중심으로 통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안전강박증’에 시달린 자금이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나선 것이다.

 미국 채권형 펀드에는 지난주에만 115억 달러의 자금이 들어왔다. 주간 유입 금액으로는 사상 최대다. 유럽의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화된 탓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펼친 정책도 영향을 줬다. 미래에셋증권 이재훈 연구원은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단기 채권을 팔고, 장기 채권을 사들이는 것) 정책을 발표한 이후 단기채 매도에 따른 머니마켓펀드(MMF)의 수익률이 좋아지고 장기채 매수로 인해 미국 중기채권의 수급이 개선된 효과도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국채에도 외국인 매수세가 이어지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2011년 6월 말 현재 외국인 보유 일본 국채는 7.4%로 1년 전에 비해 1.4%포인트 늘었다. 유럽 재정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외국인이 일본 국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저축률이 높은 데다 국내의 국채 수요가 많고, 일본은행이 지지에 나서면서 일본 국채는 안전할 것이란 분석도 세계 자금의 일본행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짐 오닐 골드먼삭스자산운용 회장은 최근 투자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채비율은 220%로 유로존의 2.5배나 열악하다”며 “일본 국채에 투자자가 몰리는 것은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보여주는 초현실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로존 위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덧붙였다.

 개인투자자도 채권 투자로 방향을 틀고 있다. 수퍼리치 고객의 자산만 관리하는 삼성증권 초고액자산가(UHNW)사업부의 이재경 상무는 “시장의 변동성이 커지자 투자자들이 기대수익률을 낮추며 채권 투자에 나서고 있다”며 “‘예금금리+α’ 정도의 3~4% 수익률 추구하면서 안정적으로 돈을 굴리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에 대비해 물가연동국채에 투자하거나 노후 대비를 위해 20년 만기 국채에 투자하는 경우도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신흥국의 통화 가치 하락폭이 지나치게 컸다고 생각한 일부 투자자는 브라질 국채 투자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고 말했다.

 채권형 펀드의 안정적인 성과도 투자자를 끄는 이유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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