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많아도 쓸돈 없는 ‘Rich but Poor’ … 투자 원금에 연연하지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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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소장

“부자들도 은퇴설계가 필요한가요?” 자주 받는 질문이다. 약간의 부러움과 시기감도 든다. 하지만 은퇴설계 상담 요청은 부자들이 더 많다. 벌려 놓은 것이 많고 남겨 줄 것도 많으니 고민도 많은 것이다.

사실 부자들은 은퇴 이슈가 훨씬 많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생각보다 심각하다. 돈을 모은 경로가 ‘백인 백색’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수 성가한 1세대이다 보니 자산관리도 다른 전문가에겐 안 맡기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자산이 제 각각의 방법으로 복잡하게 쌓여 은퇴 시점에서는 이를 스스로 풀기가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지난 몇 년간은 증권·부동산 등 자산시장도 예상 밖으로 꼬여 이런 고민이 더 깊어졌다.

 

얼마 전 수십억원의 재산을 가진 고객의 은퇴설계를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평생 증권사에는 가본 적 없이 은행에서 추천하는 금융상품에 투자하고, 상가에 투자해 월세도 받는 고객이었다. 고객의 고민은 은퇴하고 나니 생활비 쓸 돈도 제대로 없다는 것이었다.

경기가 나빠 상가 몇 개가 공실이 나 있어 은행대출이자 갚으면 끝이고, 은행에서는 펀드를 10개나 샀는데 모두 해외 주식형이라 손해를 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뭐든 팔아야 하는데 어느 것부터 팔지도 모르겠고 손해보고 팔자니 아깝기도 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펀드를 팔아도 문제다. 펀드 판 돈을 이자도 별로 없는데 넣어 놓고 매달 생활비로 빼 쓰자니 너무 비효율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동안 높았던 소비수준을 갑자기 줄일 수도 없다. 사실 요즈음은 은퇴 이후에도 활동량이 많기 때문에 생활비가 별로 줄지 않는다.

 이처럼 부자들의 은퇴설계와 관련해 간과하기 쉬운 게 은퇴소득이다. 재산이 많다고 은퇴소득이 많은 게 아니다. 재산은 많아도(Rich) 막상 쓸 돈은 없는(Poor) 가난한 부자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지금 돌아가고 있는 부동산, 금리, 인플레, 경기의 흐름을 보면 이런 가난한 부자는 빠르게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부자의 경우 은퇴준비라는 것은 그동안 쌓았던 재산을 풀어 은퇴소득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간단치 않다. 이 문제가 안 풀리면 안전벨트가 고장나 고급차에 몸이 묶여 있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선은 투자 원금에 연연하지 말고 버릴 것은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보유한 자산이나 금융상품 중 가능성 없는 것을 골라내 월지급식 금융상품 등으로 리밸런싱(재조정)하는 것이다. 리밸런싱은 상품 몇 개 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 진단을 받는 게 필요하다. 때문에 자산을 재점검해 줄 수 있는 전문가부터 찾아야 한다. 올라갈 때는 혼자 가는 게 오히려 편했지만 내려갈 때는 도움을 받아 가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좋다.

김진영 삼성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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