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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개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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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일제는 우리 민족사의 유구함을 부정하려는 식민사관 논리로 단군(檀君)을 비하했다. 심지어 단군이 민족 시조로 인식된 것은 구한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아직도 채 극복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그래서 1908년 1월 『대한매일신보』에 ‘단군시조자손(檀君始祖子孫)’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고, 『황성신문』도 그해 3월에야 “이천만 민족은 동일단군자손(同一檀君子孫)”이란 표현이 처음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버젓이 사용된다. 단군이 민족 시조가 된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이란 뜻이다. 과연 그런가?

 조선 초인 성종 16년(1485)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조선의 공식 역사관을 담고 있는데 ‘단군 조선’부터 서술하고 있다. 명나라 효종(孝宗:1487~1505) 때 사람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조선 사람들은) 대개 단군을 나라를 건국하고 영토를 연 것으로 존숭한다(蓋尊檀君爲其建邦啟土)”고 기록했다. 명나라 초기 사람들도 조선 사람들이 단군을 시조로 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세종 32년(1450) 명나라 대종(代宗:1449~57)의 등극 사실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온 예겸(倪謙)은 『조선기사(朝鮮紀事)』라는 기행문에서 “평양에서 길을 떠나 성중의 선성(宣聖:공자), 단군(檀君), 기자(箕子)의 삼묘(三廟)를 알현했다”고 쓰고 있다. 세종 때도 이미 조선 사람들은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여겼다는 뜻이다.

 조선 국왕의 사적들을 편년체로 엮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세조 1년(1456) 7월조에 “역대 시조의 위판(位版)을 고쳐 정했다”면서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 후조선시조기자지위(後朝鮮始祖箕子之位), 고구려시조동명왕지위(高句麗始祖東明王之位)로 모두 ‘지위(之位)’라는 두 글자를 더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전에는 ‘조선시조단군(朝鮮始祖檀君)’으로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 후기 문인인 목은 이색(李穡:1328~96)도 요동을 지나면서 읊은 ‘파사부(婆娑府)’라는 시에서 “당요 무진년부터 (단군을) 시조라고 칭하였네(唐堯戊辰稱始祖)”라고 서기전 24세기께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때 단군이 조선을 개창했다고 서술했다.

 조선은 물론 고려시대의 학자들도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높였다는 수많은 실증 사료에도 불구하고, 단군 존숭이 100년 되었다는 식민사관의 역사 왜곡이 아직도 횡행하는 현실이 선조들에게 부끄러운 개천절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