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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국군의 ‘단독 북진’을 명령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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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일주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고려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

10월 1일은 대한민국 국군의 날이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9월 28일 서울도 수복되었다. 이 여세를 몰아 당연히 38선을 돌파, 북진을 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미군은 꾸물대고 있었다. 미 국무부가 현상유지 전략을 검토하고 있음을 간파한 이승만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단독 북진을 명령했다. 이날이 10월 1일이며, 국군의 날로 기념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의 일생은 싸움의 일생이었다. 청년 시절에는 희망 없는 전제군주 권력과의 싸움이었다. 장년 시절에는 일본 식민지 제국주의와의 싸움이었다. 노년에 들어와서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등장한 일이 없는, 지적이고 선동적이며 명분과 힘까지 갖춘 강적과의 힘겨운 싸움이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파트너인 세계 최강국 미국이 세계질서 속에 새롭게 등장한 이 공산주의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대공산주의 태도 여하가 한반도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승만이 미국을 상대로 하는 제4라운드의 힘겨운 싸움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이 싸움은 적의 존재가 분명하고 상대가 노출되었던 과거의 싸움과는 전혀 딴판의 우군끼리의 싸움이었다. 달팽이의 양쪽 뿔 간의 쓸데없는 싸움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수 있는, 신생국 정치인으로서는 국제적으로 치명타를 맞을 수 있는 일대 모험의 싸움이기도 했다.

 공산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낼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도 미군이 38선에서 또 꾸물댄 것은 미국이 자신들의 국익을 이유로 한반도를 외면한 역사성과 무관치 않다고 이승만은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단독 북진을 명령한 것이다. 이승만과 미국 간 싸움의 압권은 1953년 6월의 반공포로 석방이다. 미국과 영국은 오로지 휴전에만 매달렸다.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포로 송환을 중립국 송환위원회의 결정에 맡기자며 미국이 양보를 해버렸다. 이승만은 이 대목에서 여기서 밀리면 대한민국의 ‘생존’은 없다고 봤다. 미국을 한반도에 붙들어 매놓지 않으면 소련·중공·일본 등 대륙세력이 우글거리는 동북아에서 ‘대한민국’은 다시 구한말로 되돌아간다고 판단했다.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수단으로 해양세력 미국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의 이익을 다시 한번 계산하게 만들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결국 한미방위조약이라는 안보우산을 엮어낸 셈이다.

 반공포로 석방 보름 후인 1953년 7월 3일 중공 주재 소련대사 바시코프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전문이 흥미롭다. 러시아연방 비밀문서 기록에 따르면 이 전문에는 “휴전 문제에서 미국과 견해를 같이 해 이승만을 고립시키고 그에게 타격을 가하여…”라고 적혀 있다. 반공포로 석방 이후 과거와는 달리 중공과 소련이 이승만과 한국군을 미군이나 영국군 등과 똑같이 명실상부한 전쟁의 상대로 인정했음을 뜻한다. 그들은 이승만을 두려워한 것이다. 국가 지도자는 오로지 나라의 ‘생존’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용감해야 한다. 첨예한 남북 대립 시기에 우남 이승만의 경륜과 용기가 그리워진다.

김일주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사무총장·고려대 교육대학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