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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만에 찍은 ‘맨발의 청춘’ … 광화문서 덕수궁 긴 줄 섰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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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960년대 충무로의 ‘흥행보증수표’로 통했던 김기덕 감독. 다음 달 제16회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데뷔작 ‘5인의 해병’(1961)을 떠올리며 그는 “전쟁터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최무룡·신영균 등 주연배우들을 달리게 하고 뒤에서 실탄을 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는 실은 배우가 되려다 감독이 됐다고 했다. ‘단종애사’ 전창근 감독(1908∼75)이 1955년 ‘불사조의 언덕’에 출연해 달라고 해 카메라 테스트를 받았다. 본인 말마따나 “키만 좀 컸더라면”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가수 겸 배우 나애심의 상대 역을 맡을 뻔 했다. 대신 전 감독 연출부에 들어간 그는 60년대 극장가를 쥐락펴락 하는 흥행감독이 됐다.

 한국 청춘물의 효시로 불리는 신성일·엄앵란 주연 ‘맨발의 청춘’(1964)을 만든 김기덕(77) 감독 얘기다.

 다음 달 6일 개막하는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 회고전이 열린다. 데뷔작 ‘5인의 해병’(1961)을 비롯해 ‘맨발의 청춘’ ‘남과 북’ ‘내 주먹을 사라’ ‘말띠신부’ ‘오늘은 왕’ ‘대괴수 용가리’ ‘늦어도 그날까지’ 8편이 상영된다. 김 감독은 77년 ‘영광의 9회말’로 은퇴할 때까지 69편을 연출했다. 1년에 4편 꼴이다. 한 사람이 이걸 다 연출했다는 게 의아하리만치 장르가 가지각색이다. 멜로·코미디·스포츠물·전쟁물·음악영화·사극에, 한국영화 사상 첫 본격 SF로 불리는 ‘대괴수 용가리’(1967)까지 입이 절로 벌어진다.

 28일 만난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연출작을 장르별로 나눠 적은 메모를 꺼냈다. “이러지 않으면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다”는 이유였다. 중후한 콧수염과 형형한 눈빛이 소싯적 배우 제안을 받았다는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참 많이, 다양하게 했어요. 60년대는 TV 보급률이 낮아서 영화가 유일한 국민의 오락매체였죠. 잘 하는 감독이 있으면 빨리, 많이 찍게 했어요. 제 스스로도 작가주의보단 투자자를 생각해 최소한의 상업성은 갖춰야 한단 생각이 강했죠.”

 ‘겹치기 연출’도 예사였다. “안양촬영소에서 한 스튜디오엔 사극, 다른 스튜디오엔 현대물 세트를 만들어놓고 왔다갔다하면서 만든 적도 있어요. 워낙 양산(量産)하던 때라 개봉 날짜를 정해놓고 시작하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출세작 ‘맨발의 청춘’은 18일 만에 촬영을 끝냈다고 한다. “크랭크인부터 개봉까지 29일 걸렸어요. 낮엔 찍고 밤엔 편집했죠.” 그는 아직도 ‘맨발의 청춘’이 상영됐던 서울 광화문 아카데미극장을 메운 인파를 기억한다.

 “늘어선 줄이 돌아 돌아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을 지나 덕수궁 앞까지 내려왔어요. 관객 10만 명이면 히트, 20만 명은 홈런이라고 했는데 ‘맨발의 청춘’은 30만 명이 봤어요. 신성일의 흰 스웨터, 트위스트 김의 가죽점퍼가 바람을 일으켰죠.”

 ‘맨발의 청춘’ 이후 ‘아카데미 극장=김기덕 극장’으로 통했다. 이 영화를 찍기 한 해 전인 63년 그는 신성일·엄앵란 커플과 함께 ‘가정교사’를 찍었다. “두 커플의 가능성을 그때 확신했죠.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의 신성일을 보니 기성 배우에게선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신선하고 현대적인 느낌이 있었어요. 깡패를 해도 밉지가 않겠더군요.”

 69명의 ‘자식’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그는 65년작 ‘남과 북’을 꼽았다. “분단소재가 금기시되던 시절 정면으로 남북 문제에 도전한 작품이었죠. 중앙정보부에 여러 번 불려갔어요. 검열 문제 때문에 끙끙 앓다 결말을 애매모호하게 끝낸 게 아직도 부끄럽고 한스러워요. 실향민들한테 반향이 컸죠. 다 큰 남자들이 극장에서 엉엉 울었으니까요.”

 그는 “50년 전 내 작품들을 보면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많다”고 말했다.

 “강우석·봉준호 이런 후배들 보면 참 잘 찍어요. 여건도 우리랑은 비교가 안되게 풍족하니 부럽죠. 60년대는 완벽한 황무지였어요. 그땐 독일에서 들여온 종군기록용 카메라로 극영화를 찍었어요. 필름이 비싸니 아예 계약서에 필름 양을 정해놓고 ‘초과하면 물어내겠다’는 조항을 넣기도 했죠. 배우들 목소리도 성우가 후시 녹음하니까 감정적으로 오버하는 연기가 많았어요. ‘대괴수 용가리’는 특수효과나 화면합성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시작한 거고요. 부산에서 관객들 만나면 좀 변명하고 싶어요. 그래도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찍었다고.”(웃음)

글=기선민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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