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칸첸중가등정기] 정신력으로 정상 밟아

중앙일보

입력

"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 "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엄홍길(파고다외국어학원)대장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려온다.

'작은 탱크' 엄홍길이 지난해 가을 불의의 사고로 한도규.현명근 두 대원을 묻었던 칸첸중가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동료 박무택 대원과 함께 17시간의 등반과 영하 20도에서의 비박. 그리고 하루 낮밤을 아무 것도 먹고 마시지 못한 상황에서 꽁꽁 언 몸으로 1시간30분 동안 걸어 칸첸중가의 정상을 밟은 것이다.

엄대장.박무택 대원 등 정상 공격조는 17일 오후 2시35분(이하 네팔시간.한국시간 오후 5시35분) 캠프Ⅳ에 도착, 잠시 눈을 붙인 후 18일 오전 2시30분 캠프를 출발했다.

음력 보름달이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 등정에는 더없이 좋았다.

18일은 네팔의 '부처님 오신 날' .칸첸중가 정상을 중심으로 구름이 간간이 맴돌고 있었지만 최근 4일간의 날씨 가운데는 최고의 상태였다.

그러나 동행하던 인도팀의 등정 속도가 너무 더뎌 암벽지대로 방향을 바꾸는 곳(해발 8천1백m)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오후 1시30분이 됐다.

이때쯤 되자 베이스캠프에는 눈발이 뿌려지고 정상 부근은 가스가 차기 시작했다.

한국-인도 합동팀은 지난 13일 영국대가 개척한 암벽지대를 우회해 정상 아래 설사면을 가로지르는 코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 코스는 지난해 봄철 박영석씨가 올랐던 암릉코스보다 2~3시간 정도 등정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그러나 고도를 높일수록 호흡은 곤란해지고 무릎까지 빠지는 경사진 눈길을 러셀을 하면서 올라야 하니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상 직전의 암벽지대에 도달하니 시간은 오후 6시30분. 날씨가 어두워져 인도팀은 정상등정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여기서 1시간을 더 등정한 엄대장은 정상 부근에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따뜻한 점을 감안, 박대원과 비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한밤중 8천3백m대의 기온은 섭씨 영하 20도를 웃돌았다.

19일 오전 4시50분 비박지점을 출발한 두 사람은 탈진한 상태에서 1시간30분 동안 힘든 발걸음으로 한국인으로는 두번째와 세번째로 칸첸중가 정상에 올랐다.

하루 낮밤을 굶고 정신력 하나로 버티며 정상에 오른 엄대장은 "먹을 것이 필요한데 오늘 정상에 오르는 팀이 없는지" 물어봐 듣는 사람들을 애타게 했다.

다행히 정상 부근에는 바람이 불지않았고 엄대장에게는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기쁠 뿐이었다.

정상까지 오르는 걸음걸음이 이들에게는 처절한 싸움이며 전투였던 것이다.

그동안 엄홍길은 크레바스를 건너고 세락(거대한 눈기둥)을 넘으며 히말라야 8천m 고봉을 하나하나 올랐다.

이제 14좌 완등을 위해 남은 것은 K2. 14번째 8천m에 오르는 날 히말라야의 설산은 작은 거인을 위해 일제히 포효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산악사는 다시 쓰여질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