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 현실 비판·멜로 강세

중앙일보

입력

이번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된 작품의 특징은 과거를 통해 현대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이야기한 작품과 멜로 드라마가 강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16일(현지시간)까지 시사가 끝난 10여 편의 경쟁작 중 코언형제의 〈친구여, 그대는 어디 있나〉는 미국 경제가 공황에 빠져 허덕이던 1930년대를 무대로, 중국의 지앙 웬(姜文)감독의 '귀지라이' 는 2차대전을 배경으로 인간의 악마성을 고발한다.

한편 노르웨이 리브 울만 감독의 〈페이스리스〉(Faithless)와 대만 에드워드 양 감독의 〈어 원 앤드 어 투〉는 예술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중년의 고독과 삶의 단면을 폭넓게 담은 양 감독의 작품은 동양적인 시선이 돋보였다.

조지 클루니와 홀리 헌트가 주연한 〈친구여, 그대는 어디 있나〉는 죄수 3명이 집단 노동소를 탈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들의 발목에는 자유를 박탈하고 서로를 한 운명으로 묶는 쇠사슬이 감겨 있다. 탈출 후 처음 만나는 맹인 예언가의 말대로 그들의 앞길은 멀고 험하기만 하다.

주인공 맥길의 목표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 아내를 되찾는 것. 이들이 부른 노래를 몰래 녹음해 '소기 바텀스 보이즈' (Soggy Bottom Boys)라는 그룹 이름으로 한몫 챙기는 사람, 몇푼 안되는 돈까지 강탈하는 외눈박이 성경판매원, 목숨을 노리는 KKK단원 지도자 등이 그들의 모험을 가로막는다.

말하자면 탈옥수들은 물리적인 쇠사슬에서는 풀려나지만 인간의 악마성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조지 클루니의 코믹 연기가 압권이다. 대퍼 댄이라는 헤어 포머드를 좋아하고 클라크 게이블을 흉내내는 게 취미인 그는 이 영화에 웃음과 생기를 불어넣는다.

감미로운 기타 선율의 노래들은 뮤지컬 영화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주지사 유세전의 소품으로 '쓸어버리자'는 의미로 빗자루가 사용되고 있는 대목도 웃음을 자아낸다.

〈페이스리스〉는 노르웨이 여배우며 감독인 리브 울만이 불륜을 당당하게 사랑의 한 형태로 '격상'시킨 작품이다. 스웨덴의 명감독이자 전 남편이었던 잉그마르 베리만이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될만했다.

시사 결과 영상미와 이야기 구조, 극적 구성이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베리만 감독은 오래 전 어느 여인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시나리오로 재구성했는데, 당사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서 이번에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 속 노작가가 바로 베리만이다.

남편과 남편의 친구, 그리고 어린 딸 사이에서 내면의 갈등을 겪는 여인의 사랑이야기로 불륜이 개인의 삶에 윤기를 더할 수 있다는 시각이 드러난다.

여주인공 레나 엔드레의 연기는 베리만이 "그녀가 아니었으면 이 영화가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을 만큼 눈부셨다.

바다와 자잘한 자갈 해변이 매우 아름다운 섬. 호젓한 통나무집에서 늙은 작가 베리만(얼란드 요셉슨)은 자신의 기억에 담긴 러브 스토리를 떠올리느라 안간힘을 쏟는다.

그때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베리만은 그녀에게 작품 속 주인공의 역할을 맡기고 마리안(레나 엔드레)이라 부른다.

마리안은 노작가에게 "그 여자의 성격은 어떤가요?" "얼굴 생김새는?" 따위의 질문을 쏟다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 한켠에 묻어두었던 그 옛날 사랑의 열정으로 빠져든다.

등장인물들이 열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열병을 앓을 때보다 불행이 닥쳤을 때 대가를 치루려는 모습이 더 인간적이고 아름답다.

38년 일본에서 출생한 울만 감독은 이미 97년 역시 베리만이 시나리오를 쓴 〈은밀한 고백〉(Private Confessions)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받아 호평을 받았다.

둘은 한때 3년을 함께 살았으며 헤어진 뒤에도 줄곧 서로 아끼는 예술세계의 동반자로 남아 있다.

울만은 기자회견에서 "예술 작품끼리 경쟁을 유도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지만 예술 영화를 널리 알리는데는 영화제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칸영화제 경쟁에 진출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