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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비행기 타고 온 괴짜들’의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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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한국은 뜨고 일본은 지고 있다. 중국은 무서운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

 지난 9일 독일 베를린에서 폐막한 유럽 최대 가전·정보기술(IT) 전시회 ‘IFA 2011’에서 나온 한·중·일 3국에 대한 평가다. 국내 업체들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입증한 반면 ‘타도 한국’을 외치던 일본 업체들은 제품의 시장성과 디자인 모두에서 한참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일본 전자업체의 쇠락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일본의 상징이었던 소니는 만성 적자에 허덕이고, 일본 반도체업계 최후의 보루이던 엘피다는 2009년 공적 자금을 투입받기에 이르렀다. 일본 대표 전자브랜드 중 하나이던 산요도 중국 자본에 팔렸다. 글로벌 모바일 시장에서 일본 업체들은 존재감을 상실했고 ‘일본에서 통하면 세계에서 통한다’는 말도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과거 일본은 1억3000만 명에 이르는 탄탄한 내수시장 덕분에 독자적인 기술 표준을 고수하면서도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 수준을 지나치게 일본 내수시장에만 맞춘 나머지 수준은 높되 세계시장의 욕구나 국제 표준과 맞지 않아 고립의 길을 걷게 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되자 일본 내수시장마저도 위기에 처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러한 일본 상황을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고 정의했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독자적으로 진화하면서 경쟁력이 약화된 나머지 외부종이 유입되자 많은 종이 멸종의 비극을 겪은 갈라파고스 섬에 빗댄 것이다.

 이처럼 일본 상황을 일컫는 말이던 ‘갈라파고스 신드롬’이 최근 들어 한국의 IT·인터넷 산업에도 적용될 조짐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에인절투자자 모임인 ‘비행기 타고 온 괴짜들(Geeks on a plane)’의 창립 멤버 벤저민 조프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IT 세계에서 갈라파고스 섬”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괴짜들’ 중에서도 동아시아에 관한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그가 이 같은 표현을 쓴 이유는 뭘까.

 먼저 국내 업체들의 지나친 기술 지상주의가 몰락기 일본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IT업계가 아이폰 쇼크를 경험한 것도 그 때문인데, 아이폰은 최고 기술의 집합체가 아니라 최고 아이디어의 집약체였다. 국내 IT산업이 지나치게 내수시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일찍이 국내 IT기업들은 사이버머니, SNS 등 세계적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했지만 내수시장에만 안주하고 글로벌화에 나서지 않아 구글·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IT기업으로 발돋움하지 못했다.

각종 규제도 IT산업 발전을 저해한다. 17일 서울에서 열린 세계 IT경영포럼에서 많은 전문가는 국내 벤처기업이 성공하기 힘든 이유로 IT산업에 대한 규제를 지적했다. 인터넷 실명제, 게임 콘텐트 사전심의 같은 ‘나 홀로 규제’가 발전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일본이 겪은 우를 우리가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보다 아이디어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기술은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기업은 기술 개발 단계에서부터 세계시장을 내다보고 표준화를 통해 글로벌시장을 확보하는 데 힘써야 한다. 정부 또한 와이브로의 경우처럼 한국형 표준만을 고집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고, IT산업에 대한 과감한 규제 개혁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노영읍위(魯嬰泣衛)라는 말이 있다. 노나라의 소녀 ‘영’이 위나라 세자의 어리석음이 제 나라에 미칠 재앙을 내다보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세상 모든 일이 나와 상관없는 것이 없으므로 항상 세계의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글로벌 경쟁 속에서 우리 기업들에 경종을 울리는 교훈이라 생각된다.

이동근 대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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