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딜레마 … 7억원, 33억원, 그리고 4조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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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호 30면

농협중앙회 회장은 법적으로 ‘비상근 명예직’이다. 명예직이라면 무보수로 봉사하는 자리가 떠오르지만 그렇지 않다. 회장 연봉이 7억원을 넘는다. 다른 상근 기관장보다 많은 편이다. 권한도 막강하다. 자산 230조원에 25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회장 권한이 너무 크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자 2009년 농협법을 개정했다. 회장이 갖고 있던 인사권을 인사추천위원회로 넘겼다. 하지만 회장이 주요 인사에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농협 사람들은 알고 있다.

고현곤 칼럼

농협 회장은 원래 상근이었지만 권한이 집중돼 있다는 지적에 따라 비상근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비상근이라는 신분이 외려 날개를 달아줬다. 비상근을 내세워 책임질 일에선 빠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4월 농협 금융전산망 마비 사태가 터졌을 때 최원병 회장은 “비상근이어서 업무를 잘 모르고 내가 한 것도 없으니 책임질 것도 없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비상근이지만, 서울 충정로 농협중앙회 본점 11층 집무실로 출근한다.

금융당국은 지난주 농협 전산사고에 대한 징계를 확정했다. 기관 경고와 함께 IT 부문 임직원 20여 명에게 정직·감봉 등 중징계를 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징계 대상에서 빠졌다. 금융감독원은 최 회장이 법적으로 IT 사업 부문에 감독 책임이 없어 징계할 수 없다고 밝혔다. 비상근 명예직의 위력이 다시 한번 발휘되는 순간이다. 전산사고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지만, 농협을 대표하는 회장은 책임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농협 회장에게 위험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회장을 직선으로 뽑은 1988년 이후 1~3대 회장이 모두 감옥살이를 했다. 한호선(1대), 원철희(2대)씨는 공금을 개인적으로 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정대근(3대)씨는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역대 기관장들 중 감옥에 가장 많이 간 사람들이 농협 회장과 국세청장”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말 그대로다.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으나 그 권한을 슬기롭게 쓰지 못하다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것만 조심하면 농협 회장만큼 괜찮은 자리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최 회장은 2009년 농협법을 개정하면서 회장 임기를 연임제에서 4년 단임제로 바꿨다. 당시 최 회장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용단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 스스로도 지난해 4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임기가 2년 정도 남았는데 잘 마무리하고 퇴임해서 고향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말 4년 임기가 끝난다. 그런데 농협법을 보면 좀 다르다. 2009년 제정한 부칙 8조에 따르면 ‘단임제는 이 법 시행 후 최초로 선출되는 중앙회장부터 적용한다’고 돼 있다. 법 개정 이전인 2007년 말 선출된 최 회장은 연임이 가능한 셈이다.

얼마 전 국정감사에서 농협중앙회가 최근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33억원을 쏟아부은 것을 문제 삼았다. 농협의 한 관계자는 “오는 12월 회장 선거를 앞두고 창립 기념행사를 과도하게 한 것은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재선에 도전할지 여부를 아직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농협은 내년 3월 경제사업(하나로마트 등 유통)과 금융사업으로 분리된다. 그러면서 경제사업을 정상화하기 위해 정부에 6조원을 요청했다. 정부는 2조원을 깎고, 4조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어려운 재정 여건에도 농협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 힘든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굳이 빠듯한 나라살림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4조원은 엄청난 돈이다. 비근한 예로 올해 논란이 됐던 소득 하위 50%의 반값 대학등록금에 필요한 돈이 연 2조원이다.

경제사업과 금융사업의 분리는 농협을 농민에게 돌려주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재정 지원으로 농협 경제사업이 제대로 돌아가고, 농민과 소비자가 골고루 혜택을 입는다면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재정 지원에 앞서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게 꼬리를 문다.

재정에서 4조원을 지원하면 방만 경영과 비리로 얼룩진 농협이 환골탈태할 수 있을까. 지난해 가을 배추대란이나 겨울 구제역 파동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까. 창립 기념행사에 33억원을 쓰는 조직이 국민 세금을 쓰겠다고 손 벌리는 것이 적절한가. 농협의 내부 기강부터 바로잡는 게 순서 아닐까. 농협 회장에게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손보는 것은? 책임을 묻지 않으려면 권한을 확 줄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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