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소설이 꼭 의미를 지녀야 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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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지음, 문학과지성사
294쪽, 1만1000원

박상륭·이인성·김태용 등과 함께 가장 전위적인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정영문(46)씨의 새 장편소설이다. 정씨 소설을 사랑하는 소수에게는 익숙할, 특유의 개성은 여전하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보다 파편적인 삽화가, 논리적 귀결에 이르는 내면의 모색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곤 하는 소득 없는 궁리가 두드러진다.

『어떤 작위의 세계』 의 작가 정영문씨. [김도훈 기자]

 이번 소설은 초반이 강렬하다. 정씨의 분신 같은 소설 속 화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 과거 여자친구 집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녀와 그녀의 새 멕시코계 남자친구가 섹스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하지만 소심한 화자는 둘을 응징할 방법이 없다. 갱으로 짐작되는 멕시코계는 완력이 강해 보인다. 기껏 화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음 속의 복수, 애꿎은 돌멩이 던지기, 뒤에서 다가가 전 여자친구 껴안기 정도다.

 그러나 이런 장면도 잠시, 소설은 차츰 소득 없고 결론 없는 화자의 머릿속 공상으로 채워진다. 선형적인 이야기 진행을 거부하기로 작심한 것처럼 공상은 산만하게 펼쳐진다. 역시 직업이 소설가인 소설 속 화자에게 삶은 권태 자체며, 소설 쓰기는 한 없이 쓸모 없는 소모전일 뿐이다. 이런 점을 꾸역꾸역 토해내는 대목에서는 화자에 대한 연민마저 생길 정도다.

 때문에 정씨 소설은 재미 있는 이야기를 기대하는 독자가 읽어서는 안 된다. 현재 한국소설의 특이한 개성을 맛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정씨 소설은, 아직까지는 상업주의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은 문학출판 시스템에 의해 가까스로 박동하는 희귀한 예술의 사례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점이 오히려 예술의 표지가 되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것 같다.

 “소설을 통한 의미와 가치 전달에 회의적이다. 그런 걸 포기했다고 할까. 때문에 내 소설에서 그런 걸 찾는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언제부턴가 내 소설은 순수한 언어 유희를 추구하게 된 것 같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소설은 이래야 한다, 하는 생각은 학교에서 주입된 19세기 사실주의 소설 이론이다. 소설에 대한 그런 통념이 오히려 소설의 영역 자체를 협소하게 한다. 이런 편향된 생각이 문제다.”

 “그게 왜 문제가 되냐”는 질문에 정씨는 “사람들의 감수성을 획일화시켜 세상의 다양한 면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예상할 수 있는 답변. 그는 소설미학이 깊다기보다 소설 관행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 같았다.

 -소설을 채프터(chapter)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상관 없다. 모두 독립적이다.”

 -당신 작품이 얼마나 새롭다고 생각하나.

 “소설에서 웬만한 실험은 다 이뤄져 더 이상 전위소설이 나오기 힘든 상황인 것 같다. 하지만 나를 포함, 몇몇 작가들의 나름의 작업은 의미 있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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