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벤처기업은 덩치만 큰 속빈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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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벤처활황 기세가 최근 들어 누그러드는 모습이다. 주가만 보더라도 미국 나스닥 시장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국내 벤처기업의 기가 푹 꺾였다. 지금의 주가조정 현상은 벤처기업의 자금조달에 차질을 빚을 것이지만 확실한 수익원의 발굴을 요구하거나 상품에 대한 질적 수준의 향상을 꾀하지 않으면 존립마저 불투명해진다는 교훈을 일깨워 주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의 벤처활황은 벤처기업 경영자들로 하여금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됐으며, 사업 초기의 자금조달이라는 숙제를 풀어 주었다.

벤처 이름만 걸고 있으면 공모를 통해 거액의 자금을 일시에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한 벤처기업들이 앞으로의 환경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면서 위기를 돌파해야 할지에 대해 몇가지 대안을 제시해 본다.

한국의 벤처는 이웃나라 일본과 비교해도 거시적 측면에서 보면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먼저 벤처 비중이 높은 인터넷 쪽을 살펴보자. 한국은 금년 초 인터넷 사용인구가 1천만명을 돌파했다. 일본의 인터넷 사용인구도 2천만명을 넘어섰지만 총인구를 고려한 인터넷 이용자 비율은 한국(22.4%)이 일본(16%)에 비해 1.4배나 높다.

새로운 세계시장 개척에 적극 참여

특히 도메인 등록건수는 한국(20만7천건)이 일본(6만5천건)의 3.2배나 됐다. 총인구 대비 도메인 등록건수 비율은 더욱 높아진다. 인터넷 사용 단말기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PC다. PC보급률은 한국(38%)이 일본(29.5%)에 비해 크게 높은 실정이다. 또한 휴대전화 보급도 한국(2천5백만대)이 일본(5천만대)에 비해 절반 정도지만 총인구 대비 보급률을 보면 오히려 한국이 일본의 1.4배로 앞선다. 이 정도로 한국의 인터넷 관련 지표는 일본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다.

하지만 정작 인터넷 기업의 수익 등 질적인 면을 살펴보면 한국이 일본에 비해 너무나 열세에 있다. 우선 전자상거래 시장 규모를 보면 한국은 일본에 비해 너무 작다. 99년의 경우 BtoC 전자상거래 시장 규모는 한국이 6백72억원인데 비해 일본은 2천4백80억엔(2조4천8백억원)으로 한국이 일본의 3%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BtoB 전자상거래 시장 규모는 더욱 작아 일본이 12조엔(1백20조원)인데 비해 한국은 1조원도 되지 않는 등 한국이 일본의 0.8%에 불과하다. 인터넷 광고시장 규모도 한국은 일본의 9% 정도이다. 뿐만 아니다. 인터넷상의 콘텐츠를 제공하는 ISP(Internet Service Provider) 업체수도 한국은 일본의 2%이다.

물론 앞으로의 성장 추세는 한국이 일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크겠지만, 절대적인 시장 규모 격차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일간의 지표 비교를 통해 볼 때 인터넷 기업들의 생존 바탕이 한국이 일본에 비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의 인터넷 관련 기업들은 좁은 국내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경쟁에서 조금이라도 낙오되면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현실을 나타낸다.

한국 벤처기업의 살 길은 세계시장 개척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벤처기업들은 좁은 국내시장을 둘러싸고 기회를 선점하는데 주력해 왔다. 새로운 분야를 발견해 최대한 빨리 진출해 남보다 먼저 기회를 선점하겠다는 것이 주된 전략이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후발 벤처들이 비슷한 분야에 진출해 과당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좁은 시장에서 과당경쟁은 필연적으로 수익력 약화를 초래한다. 이렇게 되면 수익력에 대한 명확한 전략이 없는 벤처기업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벤처와 전통기업의 접목으로 내수시장 개척

벤처기업들은 기존 전통기업과의 관계를 강화해가면서 내수시장을 적극 개척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지금의 벤처기업과 기존의 전통기업간 플러스적인 접목이 중요하다. 벤처기업이 개발한 IT(정보기술)나 인터넷, 정보통신 등의 기술을 기존의 전통산업에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확실히 기존의 전통산업에 IT를 접목하면 생산성 향상과 업무효율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

벤처기업은 안정된 수요처를 찾아야만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기존의 전통기업은 품질개선과 가격경쟁력 향상 등에서 이익을 얻게 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원재료나 부품을 인터넷으로 조달하거나, 완제품을 인터넷으로 판매하게 되면 경비절감은 물론 스피드 향상이라는 메리트를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벤처기업과 기존의 전통기업들이 상호보완 차원에서 서로 활용된다면 상승 효과가 커진다.

특히 전통기업은 정보화시대의 도래를 대비해 인터넷이나 통신 인프라 등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벤처기업으로 볼 때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시장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전통기업의 인터넷 통신망 구축이나 네트워크 시스템 사업 참여 업체인 디지털아일랜드(Digital Island)나 아카마이테크놀로지(Akamai Technologies)의 경영실적이 좋아지면서 주가가 오름세를 보이고 벤처자금이 몰리고 있다.

또한 우량 전통기업들은 벤처기업들이 개발한 기술이나 상품을 구입하는데 투자를 많이 한다. 자본이득(capital gain)만을 노린 지원보다는 본업을 보완해 주는 분야의 벤처기업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최대의 시장가치를 보유했던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GE에 이어 랭킹 2위를 기록한 시스코시스템즈는 인터넷 장비 관련 벤처기업들을 잇달아 인수하거나 투자를 확대했다. 인텔은 주력 사업인 컴퓨터 핵심 부품(CPU) 관련 벤처기업을 대거 발굴해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IBM은 루 거너스 회장의 지휘하에 인터넷 기업으로의 변신을 목표로 종합 IT 솔루션 사업을 강화하면서 이들 분야의 벤처기업들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고, GE도 기업간 전자상거래 도입을 확대하면서 이들 분야의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전통기업들은 벤처기업들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비즈니스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경영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지금 전통산업은 자사의 핵심역량 및 강점 분야에 특화하고 그 이외의 것은 외부의 벤처기업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벤처로 출발해 대기업으로 큰 미국의 델컴퓨터는 핵심역량 분야를 제외하고는 전문 벤처업체로 아웃소싱해 본사의 인원 및 경비를 대폭 감축했다.

실리 위주로 발상을 대전환

또 벤처기업들은 실리 위주로 경영전략을 대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업에 진출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가 생존의 관건이 된다. 이는 세계시장 개척에도 똑같이 적용되며, 선진국의 벤처기업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스닥 시장의 혼란속에서도 확실한 이익원을 보유하고 있거나 뛰어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는 인텔이나 시스코시스템즈 등의 주가 하락률이 다른 벤처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 물론 초기의 인터넷 사업 추진에서는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의 기대이익이 높은 사업에 진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있지만, 과당경쟁이 시작된 지금은 상황이 과거와 다르다. 누가 실제로 더 많은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사업분야를 가지고 있는가가 생존의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일본 벤처기업들도 수익원에 대한 스킴(기획)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등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야후재팬은 포털서비스의 확대를 통해 인터넷 광고수입을 극대화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예컨대 인터넷상의 전자상거래나 경매 등의 경우에도 수수료를 면제하는 파격적인 전략을 취해 네티즌의 사이트 방문횟수를 확대했다. 그 결과 99년의 경우 경영실적이 매출 57억엔, 경상이익 20억엔을 기록했을 정도로 호조세를 보였다.

창업 3년째를 맞이하는 라쿠텐이라는 일본 전자상거래 쇼핑몰(BtoC) 업체는 사이버상의 출점경비를 대폭 감축(여타 회사의 20~30분의 1 정도)해 기업의 참여 및 상품판매체결 건수를 확대해 온 결과 12억엔의 매출에 2억5천만엔이나 되는 경상이익을 실현했다. 이같이 수익원 중시 경영을 통해 주식시장의 동요에도 불구하고 실적도 높이 올리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한국의 벤처기업들의 경우에도 수익을 중시해 온 미래산업이나 핸디소프트 등의 벤처기업은 코스닥 시장의 폭락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지속하고 있음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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