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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8)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서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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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주경철 교수는 지독하다. 책 한 권을 내면서 고치고 또 고쳐 쓴다. 역사학은 철저한 사료 확인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 그런 훈련이 세상을 조직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길러준다고 말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시대다. 지구촌의 흐름을 폭넓게 이해하는 안목이 절실하다. 우리는 지금 세상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이런 점에서 주경철(서울대 서양사·51) 교수는 독보적이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벗어나 서구 근대사를 객관적으로 조망해온 학자로 손꼽힌다. 특히 바다와 교역을 키워드로 서양의 근대를 풀어본 『대항해 시대』 『문명과 바다』는 근래 보기 드문 역작으로 평가 받는다. 중앙일보와 예스24가 함께하는 ‘희망의 인문학-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은 이번 공개 대담에 주 교수를 초대했다. 우리 시대 한국인이 서양사를 하는 이유 등 학문세계는 물론 주 교수 개인사도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지난 5일 서울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만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와 주경철 서울대 교수(오른쪽).

▶정재승=먼저, 어린 시절부터 궁금합니다.

▶주경철=수업시간에 저는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요. 너의 최초의 기억이 무엇이냐.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요. 저는 어렸을 때 집밖에 나오면 우리집을 잘 못찾았어요.(웃음) 어머니께서 저를 혼자 두고 나가실 때는 문을 잠궈 놓고 나가시곤 했는데, 자물쇠가 느슨하게 걸린 여닫이 문을 최대한 밀고 바깥을 보려고 애쓴 기억이 나요. 문과 문 사이에, 바깥과 안 사이에 끼어있던 제 얼굴이 기억나네요.

▶정=학창시절에 모범생이셨죠.

▶주= 겉으로는 얌전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무엇인가를 탐색했던 것 같아요.

▶정=첫 전공은 경제학이었죠.

▶주=사회대를 갔는데, 2학년 때 과를 배정 받았어요. 그때 많은 학생이 경제학과를 갔거든요.(웃음) 요즘 학교에서 자유전공학부를 맡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마음대로 찾아가라”고 말해요. 하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많아요. 부모님의 바람대로 가는 듯해요.

▶정=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셨는데.

▶주=부전공이 역사였어요. 경제학은 현실을 법칙적으로 이해하는데 제게 맞지 않았어요. 사람의 일을 집적 들여다보고 법칙이 아닌, 말과 글로 풀어나가는 것이 더 좋았어요. 80년대 초반, 시대상황도 영향을 끼쳤죠. 어렸을 때, 문 사이에 얼굴이 끼어있던 제 최초의 기억처럼 대학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좌절하며 ‘어떤 큰 힘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느꼈죠. 그게 역사라는 생각을 했어요.

▶정=프랑스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역사학의 참맛을 느끼셨나요.

▶주=쓴맛을 느꼈죠.(웃음) 역사학에는 사료가 중요하죠. 유학 당시 지도교수님이 30개국 언어를 하셨는데, 16세기 독일어 문서를 번역하는 수업을 들었어요. 첫 수업에서 500쪽 넘는 영어·불어·독일어 책 3권을 주고 다음 주에 토론하자고 하시더군요. 네 명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엔 혼자 남았어요. 정말 공부하다가 사람이 미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도서관에서 비명을 지르고 뛰쳐나갈 뻔했어요.

▶정=하지만 환희의 순간도 있었겠죠.

▶주=그래요. 역사에는 픽션의 요소가 있어요. 사료를 파고들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가설을 세웠던 이야기가 퍼즐이 맞듯이 하나 둘 조각이 맞아떨어지면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 있죠. 개연성이 높은 픽션처럼요. 네덜란드 상인이 동유럽과 어떻게 무역했는지를 추적하며 그런 희열을 맛보았죠.

▶정=반대되는 증거가 나오거나 안 맞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주=많죠. 제국주의 초기 단계에 서유럽이 동유럽을 착취했다고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출발했어도 사료를 보다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착취만은 아니었어요. 역사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에요. 들여다보면 훨씬 심층적이고 복합적이죠. 일률적으로 흘러가지 않아요. 다른 사료를 무시하고 한 면만을 강조하면 정직하지 못한 역사가 되는 거죠.

▶정=역사학은 사료, 즉 팩트라는 말씀이신가요.

▶주=지도교수님이 사료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셨죠. 큰 얘기,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한국에 돌아와 교수 일을 하면서 1차 사료에 매달리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쉬웠죠. 지도교수님이 꿈에 여러 번 나타나 꾸짖으셨죠. 나중엔 꿈에 한국말까지 하시더군요. “주군, 지금 뭣하고 있나?” 하고.(웃음)

▶정=한국의 서양사학자는 어떤 연구를 해야 할까요.

▶주=서양사의 재해석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서양사이면서 지구사인 것, 우리에게 서양이란 무엇인가, 근대세계라는 것이라는 게 서구가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겠죠. 서양에서 나름 해석해온 틀이 있는데, 그들이 얘기해온 것에 머무를 필요는 없어요. 자기들 이야기니 함정에 빠질 수도 있거든요.

▶정=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주=늘 제기되는 질문인데, 완비된 답이 없어요. 저는 지금도 묻고 있어요. 역사학이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거든요. 인문학 전반이 그런 것 같은데, 사고의 폭을 넓히고 사고를 조직화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죠. 결국엔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죠. 날림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하죠.

▶정=책을 왕성하게 냈습니다. 의미 있는 걸 꼽아주시죠.

▶주=『대항해 시대』죠. 가장 큰 집을 지었죠. 그거 짓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고요. 양을 3배로 쓴다고 3배로 힘든 게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가 있어야 하니까 몇 배나 더 힘들었죠. 600쪽 정도 되는데, 초고를 쓰고도, 계속 고치고 100번 정도 고친 것 같아요. (모두 탄성) 『대항해 시대』는 아카데믹한 건데, 일반인도 많이 읽어서 놀랐죠.

▶정=후속편도 중요하겠죠.

▶주=『대항해 시대』가 연구계획서라면, 이제는 그 안에 들어간 여러 장의 이야기를 하나씩 파고 싶어요. 예를 들어 세계화폐사, 노예, 해적 등을 주제로 쓰고싶어요.

▶정=방청객 질문도 받기로 하죠.

▶주=항의, 제안, 충고, 다 좋습니다.(웃음)

▶독자 1=서양에서는 문화재 관리를 잘 하는데, 우리는 파괴하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역사를 보는 눈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주=문화나 역사에 대한 태도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여기 있는 분 중 동대문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하면 5분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반면 프랑스인들은 주변에 대한 관심이 폭넓고, 구체적으로 많이 알고 있어요. 그냥 ‘낡은 집’이라며 허물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느 한 사람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그 가치를 알아야죠.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네덜란드의 고문서보관소에서 놀란 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와요. 마이크로필름으로 자료를 보는 모습이 신기하죠. 자기 조상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게 취미에요. 집을 추적하기도 하고, 가계도 그리는 걸 열심히 해요. TV광고에 “가계도 그리느라 힘드셨죠. 이걸 써보세요!” 이런 문구도 나오죠. 역사가 일상화된 거에요. 거기서 만난 할머니가 제게 “너도 조상을 찾느냐”고 물으셨어요.(모두 웃음)

▶독자2=책을 쓰실 때 어떤 사관을 전하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주=어떤 사관을 보여줘야겠다. 이런 생각은 없어요. 너만의 생각을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죠, 한 가지 생각을 제시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내 주장을 강하게 해서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믿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정=촛불집회 같은 사건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주=한국사회의 변곡점을 일으킬 만한 사건으론 보진 않습니다. 20세기 후반의 역사가 변화를 겪으며 여기까지 온 거죠. 반면 9·11 은 큰 렌즈를 대고 봐야 할 사건이었죠. ‘더 이상 미국단독의 시대는 아니구나’라는 해석이 될 만한 사건입니다. 유라시아 대륙 내의 구조적인 문제였던 이슬람·기독교 문명권의 충돌, 20세기 미국의 패권과 그것이 흔들리는 가운데 이슬람 세계의 성장. 이런 흐름의 정점으로서의 9·11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겠죠.

정리=이은주 기자
김민영 프리랜서·작가

◆주경철=1960년 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사.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 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자유전공학부 부학부장. 저서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1999),『테레시아스의 역사』(2002),『문학으로 역사읽기, 역사로 문학읽기』(2009), 『근대 유럽의 형성』(공저·2011) 등.

주경철의 책·책·책

 ◆대항해 시대(2008·서울대 출판부)= 근대 세계사를 해양 세계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폭력성을 근대 세계의 기본 특징의 하나로 보고 항해를 통한 유럽 팽창과정이 폭력의 확대과정임을 살폈다. 상호 소통이나 지배가 물질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층적인 내면 요소에도 서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문명과 바다(2009·산처럼)=바다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근대 세계사. 『대항해 시대』가 연구서라면, 이 책은 일반 독자를 위해 완전히 새로 썼다. 해양세계를 무대로 일어났던 복잡 다양한 사건과 고통스럽고 활기찼던 삶을 생생한 시각자료와 함께 소개했다.

※주경철·정재승 교수 대담 동영상과 내용 전문을 중앙일보와 예스24가 함께하는 ‘희망의 인문학’ 캠페인 홈페이지(inmun.yes24.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QR코드로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소감을 10월 10일 홈페이지 댓글 코너에 글을 남겨주시거나 분야별 추천 도서에 대한 서평을 올려주세요. 선정된 독자께 도서지원금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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