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90년대 혼돈의 캠퍼스 청춘들의 은밀한 욕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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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랑, 그 녀석
한차현 지음, 열림원
372쪽, 1만2500원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 정상회담을 강행하는 노태우, 차기 혹은 차차기를 노리고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씨 성 정치가들, 1980년대와 다를 바 없이 최루탄이 난무하던 대학가 캠퍼스, 이광조·최성수·이문세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허름한 맥주집, 텅 빈 오후의 동아리방,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던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죽은 시인의 사회’ ‘장군의 아들’을 보러 다니던 국도·중앙·스카라·명보 같은 이름의 극장들, 수업 빼먹고 춘천행 기차를 타는 청춘들….

 90년대를 구성하는 정치경제, 사회문화적 세목을 소상하게 되살린 성장소설이다. 이제는 486이 돼버린 386세대부터 90년대 초·중반 학번에게까지 학창시절을 환기하는 효과가 강력할 것 같다.

 소설의 초점은 단순히 90년대적 시공간이 아니다. ‘격동의 80년대’ 혹은 ‘대망의 90년대’ 같은 선전성 구호가 약속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너절한 삶을 살던 당시 대학생의 속살이랄까. 구체적으로, 세상이 너저분하기 때문에 더욱 그로부터 도피하게 되는 청춘의 사랑 이야기가 소설의 알맹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저자와 이름이 같은 한차현이다. 역시 저자의 학창시절과 비슷하게 소설 속 한차현은 소설가 지망생이다. 문학 동아리 선후배들이 우르르 베스트셀러 작가 박범신을 찾아가는 장면도 나온다.

 이건 웬 시츄에이션? 혹시 한씨의 실명 자전소설? 그렇다면 여자친구만 만났다 하면 신체의 일부 해면체 조직이 부풀어올라 괴로워하는 민망한 얘기가 한씨 자신의 얘기? 어디까지가 한씨 본인의 얘기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분명히 소설은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분주하게 오간다. 한씨 스스로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옛날 자료들, 특히 신문 기사를 촘촘히 검색했다고 밝힌다. 성실하게 90년대를 고증한 것이다.

 중요한 건 소설에 녹아 있는 한씨 개인의 체험의 분량이 아니다. 소설 주인공 한차현의 동선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은밀한 욕망, 가슴 한 켠에 꼬깃꼬깃 숨겨 놓은 안타깝지만 아름다운 한때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래서일 게다. 소설책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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