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03) 경북고의 영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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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왼쪽)이 국회의원 시절인 2000년 대구구장을 찾아 경북고 후배인 이승엽을 격려하고 있다. 두 사람 뒤로 삼성의 외국인 용병 훌리오 프랑코가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프로야구가 6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 기초가 된 것은 예전 고교야구의 인기다. 모교인 경북고가 전국 무대를 휩쓸던 1960년대 중반부터 나는 경북고 야구팀의 최대 후원자였다. 개인적으로도 야구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근사한 수영장과 운동장을 갖춘 경북중 시절 야구팀에서 1루수로 뛰었다. 6·25가 터지면서 학교가 군에 접수되고, 가(假)교사를 떠돌며 수업 받느라 고등학교까지 야구를 할 수 없었다.

 영화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67~68년, 경북고 야구팀은 전국 최강팀으로 우뚝 섰다. 좌완투수 임신근을 앞세워 67년 전국대회 5회 우승, 68년 전국대회 7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경북고 야구팀이 결승을 이틀 앞두고 이태원 181번지 우리집을 찾은 적이 있다. 서영무 감독을 비롯해 후배 선수들과 학부모까지 스무 명 남짓했다.

 아내 엄앵란은 불고기 파티를 열어주었다. 고기 먹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이태원 181번지는 선수단 전원이 들어와 있어도 넉넉했다. 3층 응접실에는 선물로 받은 값진 술이 있었다. 엄앵란이 “이게 세계 최고의 술”이라며 코냑을 한 잔씩 따라주었다. 코냑을 처음 마신 학생들이 얼마나 알딸딸했을까. 임신근을 비롯한 선수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우리집에서 꼬냑 마신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다음 날 명보극장에서 내가 출연한 작품을 보여주기도 했다. 임신근부터 대통령배 2년 연속 최우수선수상, 71년 전국대회 5회 우승에 빛나는 ‘철완’ 남우식까지가 내 집을 찾았던 멤버들이다. 71년 이태원에서 이사 갈 때까지 몇 년간 모교 야구팀을 대접했다.

 야구팀은 동대문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운 여관을 숙소로 잡았다. 그라운드에 나가 후배들을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모교만 응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밤에 여관을 살짝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했다. 77년 고교야구를 소재로 한 ‘영광의 9회말’에 출연하고, 82년 삼성 라이온즈의 자문위원을 맡았던 것도 이러한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

 류중일(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경북고 유격수로 이름을 날리던 83년 초의 일이다. 당시 MBC 청룡의 수석코치인 유백만은 나와 의형제였다. 유백만이 내게 류중일을 MBC로 데려오고 싶으니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MBC는 유격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나는 유백만과 함께 한양대 운동장으로 류중일을 찾아갔다.

 “중일아, 너 MBC 안 갈래?

 “전 대학 진학한 후 프로로 가겠습니다.”

 류중일은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스카우트는 실패했다. 그가 83년 한양대로 진학하면서 MBC와의 인연은 끊어지고 말았다. 류중일은 프로에 가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마침 대구에선 지역출신 감독이 삼성의 지휘봉을 잡아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올 초 류 감독이 첫 승을 거둔 후 격려의 전화를 했다.

 “류 감독 축하한다. 모든 사람이 자넬 환영하고 있다. 힘내게.”

 류 감독의 두 번째 경기는 직접 야구장에서 보았는데 패했다. 양준혁·박석민 등 선수 아버지들과 어울려 대구구장 앞 맥주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승엽은 경북고 후배다. 최근 세상을 떠난 장효조·최동원도 내 마음의 별이다. 장효조의 장례식(부산동아대학교병원)에는 직접 다녀왔다. 명복을 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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