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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옥아, 그건 실수였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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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호 10면

나이가 들수록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된다. 나는 모든 것을 아는 것 같다. 예전에는 그저그런 것 같았는데 요즘은 정말 그렇다는 확신이 든다. 나는 상대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앞으로 무슨 행동을 할 것인지, 심지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그래서 나는 언제나 옳다. 한 살을 더 먹고 직위가 높아질수록 그런 생각은 확고해진다. 그런 사람은 남을 칭찬하기보다 비난하기 쉽다. 비난에는 관성이 있다. 하다 보면 점점 과격해진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도를 넘어 상대에게 상처와 모욕을 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실수다.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남옥이를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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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등학교를 세 군데나 다녔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한 번 전학했고 또 5학년 2학기를 앞두고 학교를 옮겼다. 그래서 입학한 곳과 주로 다닌 곳과 졸업한 곳이 다 다르다. 세 학교 모두 내게는 소중한 모교지만 2학년 2학기부터 5학년 1학기까지 다녔던 초등학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른바 풋사랑이 싹트는 시절 아니겠는가. 조숙한 친구 녀석들 몇은 그때 이미 첫사랑이 어쩌고 했지만 다행히도, 불행히도 나는 너무 어리고 뭘 몰랐다. 그저 짓궂은 장난이나 치는 못된 꼬마였다.

남옥이는 4학년 때 내 뒷자리에 앉았던 여학생이었다. 발육이 빨랐던지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고 가슴도 제법 봉긋 나온 아이였다. 힘도 나보다 셌을 텐데 마음이 어질고 순해서 늘 내게 져주곤 했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까맸지만 눈은 꼭 소의 눈처럼 크고 맑았다. 남옥이는 공부를 참 못했다. 내게는 남옥이를 깔보는 마음이 있었다.

남옥이는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 자꾸 장난을 걸었다. 원래 나도 장난치기를 좋아하지만, 아이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남옥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나는 남옥이에게 ‘하지마! 너 자꾸 그러면 이걸로 손 찍는다’는 뜻으로 연필을 손에 쥐어 보였다. 물론 나는 남옥이에게 겁만 주려고 그랬다. 내 경고를 장난으로 여겼는지 남옥이는 웃으며 계속 장난을 걸었고 겁만 주려고 찍는 시늉만 내려던 나는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만 연필로 남옥이 손을 찍고 말았다. 연필심이 남옥이 손바닥에 박혔다. 피가 났다. 남옥이는 너무 놀라 눈만 껌뻑껌뻑 했다. 나는 남옥이보다 더 놀라고 당황했다. 실수였다.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두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내게 놀랐다.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스스로도 너무 놀랐다. 나는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본능적인 자기방어였을까? 내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합리화였을까? 사실은 실수로 그런 것인데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큰일이 벌어지자 나는 정말 그렇게 한 것으로 해버렸다. 남옥이는 내게 잘못했고 나는 남옥이를 응징한 것이다. 실수였다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내자 남옥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엉엉 울었다. 소처럼 서럽게.

서럽게 울던 남옥이도 최백호 선생의 노래처럼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가겠지. 만일 이 글을 본다면 지금이라도 말해주고 싶다. 남옥아, 그건 실수였어. 그냥 겁만 주려고 그랬던 거야.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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