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공정위 “통큰 합의” vs 유통업체 “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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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이상렬
경제부문 기자

지난 6일 오전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과 11개 유통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의 명동 은행회관 간담회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기자는 행사장 바깥 유리창에 붙어서서 블라인드 틈 사이로 간담회를 지켜봤다.

간담회 풍경은 ‘관치’의 현장 같았다. 김 위원장은 수수료 인하 합의 문구가 적힌 A4용지를 꺼내들고 참석한 CEO들을 압박했다. 몇몇 CEO들이 이런저런 항변에 나섰다가 이내 말문을 닫았다. 한참 뒤 공정위 직원들은 애초의 합의문을 고친 A4용지를 CEO들에게 돌렸다. CEO들은 말 없이 합의문을 접어 양복 윗저고리에 집어넣었다. 110분간의 간담회 뒤 김 위원장과 CEO들은 따로 따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CEO들은 입을 꽉 다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을 기자들이 에워쌌다. 그는 “잘 합의됐다는 말씀을 드리겠다”고 말하고 행사장을 벗어났다. 한 CEO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입을 열었다. “거 참, 이걸 합의라고 해야 할지…”.

 오후 2시, 공정위는 “통 크게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날 합의에는 정작 어떤 업체가 수수료 인하 혜택을 받을지에 대한 결론이 없었다. 알맹이가 빠진 것이다. 공정위와 CEO들은 “세부 대상은 유통업체가 결정한다”고 절충했다. 공정위 발표 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CEO들은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기 어려워 가만히 있었던 것”이라며 “공정위는 ‘수수료 인하 합의 발표’라는 명분을, 유통업계는 수수료 인하 대상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것을 피하는 실리를 얻었다”고 해석했다. 공정위와 유통업계의 수수료 인하 공방은 구체적으로 어떤 중소기업의 수수료를 깎아주느냐를 결정하는 ‘시즌 2’가 남았다. 사실 수수료 문제에 관해선 공정위나 유통업체나 모두 적잖은 비난을 받았다. 공정위는 과격한 개입이, 유통업체는 과도하다는 지적을 받는 수수료 수준이 논란거리였다. 기왕 수수료를 내리기로 했다면 공정위는 유통업체의 자율 결정을 존중하고, 업계는 지원이 필요한 괜찮은 중소기업을 적극 선정했으면 좋겠다. 시장경제 원칙을 지키면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이상렬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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