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처럼 80보, 볼트 앞엔 아무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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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m에서 우승한 볼트는 익살스럽고 다양한 동작으로 끼를 마음껏 발산했다. 볼트가 몰려든 사진기자들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구 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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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는 챔피언이다. 더 이상 실패는 없다. 나를 믿어라.”

돌아온 황제는 사자후를 토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가 100m 부정출발 실격의 굴욕을 씻었다. 볼트는 마침내 3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2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2009년 세계선수권에 이어 2연속 우승이다. 공식 기록은 19초40. 2위인 월터 딕스(미국)를 0.30초 차로 여유 있게 따돌렸다. 자신의 세계기록(19초19)을 깨지는 못했지만 올해 세계 최고 기록이다.

200m 결승 출발선에 선 볼트의 장난기는 여전했다. 중계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자 손에 침을 묻혀 눈썹을 다듬고 전매특허인 번개 세리머니를 했다.

스타트는 좋지 않았다. 100m 당시의 실격을 의식한 듯 몸을 사렸다. 반응속도가 출전 선수 8명 중 가장 늦은 0.198초였다. 하지만 코너구간을 지나 직선주로에 접어들면서 1위로 치고 나섰다. 출발부터 골인까지 200m를 80보로 마무리했다. 훈련 때 그대로였다. 황제의 복귀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볼트가 200m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기록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려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볼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기록은 깨지 못했지만 올시즌 최고기록을 세웠다. [대구 AP=연합뉴스]

볼트가 1위로 골인하자 대구스타디움은 함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대회 출전선수가 ‘볼트와 그 외 선수’로 분류될 만큼 그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이날 대구스타디움은 5만여 팬으로 가득 찼다. 4층 스탠드는 통로까지 관중에게 점령당했다. 모두가 볼트를 보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 100m 때의 충격적인 실격이 오히려 200m의 기대감을 높여놓은 셈이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볼트는 “1등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를 성원해준 대구 시민들이 너무 감사하다”며 스타디움에서 흘러나온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관중석 쪽으로 다가서던 볼트는 몰려든 사진기자들을 따돌리면서 일부러 방향을 이리저리 바꿨다. 관중석에선 폭소가 터져나왔다.

볼트의 귀환은 엿새 만에 이뤄졌다. 지난달 28일 100m 결승에서 볼트가 실격당했을 때 대구스타디움은 탄식 소리에 묻혔다. 팬들은 ‘황제의 몰락’이란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실망이 큰 건 볼트 본인이었다. 레인을 벗어난 볼트는 하늘을 향해 중얼거리면서 벽을 치며 자책했다.

대스타지만 인터뷰 인심이 좋았던 볼트는 이날 취재구역을 통과하지 않고 경기장을 떠났다. 그리고 곧바로 대구스타디움 바로 옆에 있는 보조경기장으로 향했다. 불이 꺼져 어둑어둑한 트랙을 내달렸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는 재충전도 빨랐다. 5분여를 달린 뒤 승용차를 모는 기사에게 “선수촌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는 볼트에게 재차 물었다. 예정대로라면 이날 저녁의 행선지는 호텔이어야 했다. “선수촌!” 볼트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자신이 100m에서 우승할 것이라고 믿었던 볼트는 원래는 이날부터 선수촌을 나와 호텔에서 지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굴욕을 참을 수 없는 듯 다시 선수촌으로 돌아갔다. 와신상담이다. 다음날 선수촌 훈련장에 나타난 볼트는 수다스럽고 장난기 많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식욕도 왕성했다. 좋아하는 닭튀김을 평소보다 더 먹어치웠다. 황새처럼 긴 다리에서 나오는 엄청난 보폭, 서아프리카 혈통의 유산인 강력한 파워존(고관절을 중심으로한 신체의 중심)과 근육이 그의 무기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무기는 카리브해 사람들의 낙천적인 성격이었을지 모른다.

볼트의 후원업체 푸마코리아의 김동욱 마케팅 팀장은 “언론에 보도된 것과 달리 실격된 당일도 볼트는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무척 평온했다. 이런 면에서 그가 위대한 선수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전했다.

볼트는 4일 오후 9시 남자 400m 계주에 출전해 피날레를 장식한다. 폐막식 직전 열리는 이번 대회 마지막 경기다.

아사파 파월이 부상으로 빠졌지만 100m 우승자 요한 블레이크와 네스타 카터, 그리고 마이클 프레이터가 최강 자메이카팀을 이룬다. 100m 결승에 오른 8명 중 3명이 자메이카 계주 멤버였다. 스타팅에서 실격이나 바통을 놓치는 일이 없다면 볼트의 대회 2관왕은 무난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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