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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9단’에게 어울리는 말러 비현실화에 의한 독특한 현실 표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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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27면

태권도나 바둑에서 치는 몇 급, 몇 단처럼 음악 듣기에도 그런 등급화가 가능할까. “김 선생은 클래식 5급이군요. 아 네, 박 교수님은 무려 7단이라네요.” 웃기는 짬뽕 같은 소리다. 지식의 높낮이는 있지만 그것이 혈관 속에 선율을 흐르게 만드는 능력의 차이를 뜻하지는 않는다. 대학 시절 알파벳을 떼지 못한 건달 출신 록 매니어와 친했던 적이 있다. 로커를 향한 그 사무치는 열정, 그리고 가짜 뮤지션을 판별해 내는 건달 친구의 능력은 탄복할 만했다. 비록 음반 재킷에 쓰인 글자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그는 마셜 터커 밴드를 원수처럼 혐오했고 듀언 올맨만이 진짜 서든록을 구사할 수 있다고 침을 튀기며 주장했다. 반론을 제기하면 한 대 맞았을 것이다).

詩人의 음악 읽기 구스타프 말러-지독한 음악 듣기<1>

그런데도 감히 내 맘대로 등급화를 해보련다. 클래식 음악 감상에서 고수에 이른 아주 높은 단계. 한 9단쯤 되는 등급은 말러를 즐겁게 들을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왜 그럴까. 말러 음악은 아주 쉬우면서 동시에 아주 어렵다. 일단 쉬운 면은 말러가 구사하는 선율에서 기인한다. 대개 지방 민요나 군악대에서 채취한 주 멜로디들은 조야하기 이를 데 없다.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주는 말러라는 인물의 교향곡을 처음 듣는다면 기약 없이 솟구치다 허무하게 꺼지곤 하는 선율들에 “뭐 이래?” 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쉽고 만만한 면은 말러 음악의 현대성 때문이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푹 빠지려면 청자(聽者)의 정서적·문화적 시간대를 한 200년 전 유럽으로 옮겨가야 새로움도 신선함도 느껴진다. 말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 음울하고 지리멸렬한 사운드는 오늘날의 문명적 감수성과 그리 멀지 않다. 옛날 음악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말러는 어렵다고 휘휘 고개를 젓는다. 일단 스케일 때문일 것이다. 많은 악기, 긴 시간. 이것이 말러의 음악이다. 맥시멀리즘(최대주의)이라고 부를 법한, 하드코어적 사운드 구조가 청자의 뇌수를 두들겨 팬다. 아니면 느리게 더욱 느리게 끌고 끌면서 마침내 ‘졌다’ 하고 잠으로 달아나 버리도록 만든다. 성질이 못되기로 유명한 인물이 말러인데 자기 작품 안에 유감없이 신경질을 부려놓았다. 그렇건만 온 세상에 말러광은 넘쳐난다. 혹시 마조히즘적 음악 사랑?

조지 셸이 지휘한 ‘소년의 마술 뿔피리’ 음반.

교향곡보다 가곡을 먼저 접하라
말러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면 그의 평생 동반자였던 지휘자 브루노 발터의 말러 평전 사랑과 죽음의 교향곡을 읽는 것이 가장 적확하다. 독서가 부담스럽다면 다음의 선문답을 여러 번 되풀이 읽어본다. ‘말러의 음악세계는 비현실화에 의한 독특한 현실이다’. 미학자 아도르노가 설파한 심오하고 알쏭달쏭한 말인데 말러의 작곡 이념을 집약한 명언으로 평가된다. 비현실화는 무엇이고 독특한 현실이란 또 뭔 말인가. 구체적인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말러의 작품은 12편의 교향곡과 52곡의 가곡으로 정리된다. 초기의 몇몇 기악곡은 버린 수치다. 일단 말러 듣기의 괴로움을 감수할 각오가 섰다면 덥석 교향곡부터 물 것이 아니라 가곡을 먼저 접한다. 가곡 안에 대다수 교향곡의 테마 선율이 담겨 있다.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나 ‘뤼케르트 시에 의한 5개의 가곡’같이 옷깃부터 여미고 들어야 할 유명 곡 말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소년의 마술 뿔피리’ 12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4곡을 먼저 듣는다. 청취 방법은 눈을 부릅뜨고 듣는다, 졸며 깨며 듣는다 두 가지가 있는데 병행이 좋다. 그리고 나중에 가사 번역본을 찾아본다.

‘뿔피리’의 제6곡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파드바의 성 안토니우스’는 이런 내용이다. 목회자가 설교를 하러 교회를 가니 아무도 없고… 근처 강가 물고기들을 상대로 설교를 한다. 여러 물고기가 등장하여 감화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설교가 끝나자마자 ‘게는 여전히 굼뜨고 대구는 여전히 뚱뚱하고 잉어는 여전히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다들 설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예전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술에 취한 듯한 물고기들의 바보스러운 표정이 그려진다. 제5곡의 제목은 ‘속세의 삶’이다. 빵을 달라고 우는 아이와 엄마의 대화. 엄마는 계속 ‘내일 꼭 보리를 베어 올 테니 기다리렴’을 반복하고 배고픈 아이의 호소는 이어지고. 간신히 빵이 구워졌을 때 아이는 굶주려 죽어 있었다. 불침번 서는 병사가 군악과 그리운 애인의 환영 속을 헤매는 노래도 있고, 뻐꾸기와 꾀꼬리가 당나귀를 심판으로 노래 대결을 벌이는 곡도 있다.

유머, 풍자, 고발, 고뇌, 사랑 등이 두루 녹아 있는데 우리는 말러라는 존재를 의식하며 듣게 된다. 그가 살았고 증언하는 ‘어떤 세상’ 속으로 일단 따라 들어가는 것이다. 말러가 인도하는 세계. 그곳은 유머조차 편안하지 않은 불편한 현실 속이다. 음악은 가사의 현실을 뒷받침한다기보다 무언가를 마구 휘젓는 느낌이 든다. 말러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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